외적 침입 막아낸 강화도의 두 요새, 광성보와 덕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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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 침입 막아낸 강화도의 두 요새, 광성보와 덕진진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2.25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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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226호 강화 덕진진 (사진 = CPN문화재TV)
사적 제226호 강화 덕진진 (사진 = CPN문화재TV)

 

우리나라는 반도 국가로서 예로부터 외적의 수많은 침입을 받아왔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주로 중국과 일본이 대부분이었지만, 19세기 이양선이 출몰하면서 서양세력들도 침투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를 탄압하는 등 서양의 문물을 배척하는 정책을 펼쳤다. 문호를 개방하라고 요구하는 서양과 배척하는 조선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져갔고, 결국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크게 번지고 말았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시기는 차이가 나지만 강화도에서 벌어졌다는 유사점이 있다. 왜 외세들은 강화도에 주목했을까.

 

강화도는 지형적으로 인천, 서울과 가까우며 한강에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하는 섬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오로지 배로만 진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한양에 가기 위해서는 강화도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는 수도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도 강화도에는 두 양요 특히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격전지들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사적 제226강화 덕진진과 사적 제227강화 광성보가 대표적인 유적지다.

 

사적 제226강화 덕진진은 고려시대부터 강화도를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기록되어 있다.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장군의 군대가 거쳐 간 곳이었으며,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하게 포격전을 벌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미국군대가 점령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파괴됐다. 1976년 성곽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으며, 돈대(소규모 군사 기지), 누각, 대포 등도 복원돼 현재의 모습에 이른다.

 

사적 제227호 강화 광성보 (사진 = CPN문화재TV)
사적 제227호 강화 광성보 (사진 = CPN문화재TV)

 

사적 제227강화 광성보는 고려 몽고침략 당시 강화로 도읍을 옮길 당시에 쌓은 것으로 조선시대에 몇 번 규모를 키우고 고쳐왔다.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로 알려져 있으며,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순국한 장소다. 1976년 복원 당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했다.

 

현재 두 요새의 상황은 어떨까.

 

김국환 문화재청 보존정책과 주무관은 “2013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광성보는 전반적인 보존관리 상태는 양호하나, 광성 돈대와 손돌목 돈대, 용두돈대의 전돌 여장 균열은 지속 관찰을 통한 보수 검토가 요구되며, 안해루의 철엽문 하부 철판부식 박리 및 신미양요순구무명용사비의 줄눈 탈락 등은 경미보수 필요하다고 밝혔다.

 

, “덕진진은 시공이 거칠게 마감되어 경관을 저해하고 있으며, 구조적 안정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이 요구된다. 돈대 북측에 식생하는 수목 중 돈대의 보존에 영향을 미치며 경관을 차폐하는 수목은 제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백성들을 지키고자 싸웠던 조선군의 열정은 오늘날 강화도에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있다.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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