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지 탐방-독립운동사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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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탐방-독립운동사의 현장
  • 심연홍 기자
  • 승인 2020.03.0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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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구지

3.1절은 맞이하여 세계 각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장소를 추억해보기로 한다. 여러 지역 가운데에서 프랑스 파리에 있는 사적지를 가본다.

 

1919년 3월 13일,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은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스위스로부터 이관용(李灌鎔), 상하이(上海)로부터 김탕(金湯)과 조소앙(趙素昻)이, 미국에서는 황기환(黃玘煥)과 여운홍(呂運弘)이 연이어 파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김규식을 보좌하여 평화회의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였다.

파리위원부 건물 1층 잡화점 입구(2010). (사진=독립기념관)
파리위원부 건물 1층 잡화점 입구(2010). (사진=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가 활동하던 샤토덩 거리 38번지 건물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파리 예술의 전당인 국립오페라극장 북쪽, 성라자르역 동쪽으로 서너 블록쯤 떨어진 십자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7층 석조 건물이다. 1층과 7층은 근래에 수리하여 원형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나머지 6층은 회홍색의 석조로 된 고색창연한 건물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는 이 건물에 입주하여 여러 외교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활동 보도 기사(1920년).(사진=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활동 보도 기사(1920년).(사진=독립기념관)

 

한편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4월 13일 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의 대한민국위원 및 주파리위원부의 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파리 강화회의가 끝난 뒤 1919년 8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김탕과 여운홍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이관용과 황기환이 위원장 직무를 대리하였고, 1921년 7월 황기환이 도미할 당시까지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자유한국》 등의 선전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다양한 국제회의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1919년 4월 출범 당시 샤토덩 거리 38번지(38, Rue de Chateaudun)에 본부를 두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는 1920년 중반 이후에 비엔나 거리 13번지(13, Rue de Vienne, 통신우체함 제369호)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자유한국》(1920년 8ㆍ9월호 이후)과 『구주의 우리 사업』 발간처 주소는 이곳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지번 일대는 재건축으로 인하여 당시 건물의 원형을 찾을 수 없는 실정이다.

파리위원부 건물 근처 거리 전경(2010).(사진=독립기념관)
파리위원부 건물 근처 거리 전경(2010).(사진=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초기의 파리위원부가 입주해있던 샤토덩 거리 38번지 건물은 얼마 전까지 프랑스 보험연합회사가 건물 1층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슈퍼마켓(가게명 : FRANPRIX)이 들어서 있다. 건물 벽면에는 미국 작가인 윌리엄 사로얀(Wiliam Saroyan)이 이곳에 거주했다는 안내판이 부착되어 있고, 길 건너편으로는 윌슨 호텔(Wilson Hotel)이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는 예술과 낭만의 상징으로 알려진 도시다. 그곳에 가게 되면 잠시라도 짬을 내어 독립투사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적지를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국가를 위하여 피와 땀을 바친 고귀한 분들을 잠시라도 기억할 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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