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광군의 130년을 담고 있는 3형제의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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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의 130년을 담고 있는 3형제의 가옥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3.06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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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등록문화재 제678호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

 

국가등록문화재 제678호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 원경 (사진 = CPN문화재TV)
국가등록문화재 제678호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 원경 (사진 = CPN문화재TV)

 

전남 영광군의 영광군청 옆에 위치하고 있는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은 도시개발이 된 주변과 달리 전통한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가옥이다.

 

이 가옥은 한 울타리 안에서 3형제의 전통가옥이 보존되어 있는데, 제각기 다른 형상으로 구성된 한옥전통가옥의 집단군으로 이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가옥군의 형태로 평가받고 있다.

 

장남댁 안채 상량문, 1880년대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 CPN문화재TV)
장남댁 안채 상량문, 1880년대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 CPN문화재TV)

 

1880년대 조병무(현 소유자의 고조부)가 현재의 장남댁인 본집을 지어서 아버지 조윤민(현 소유자의 현조부)와 살고 있었다. 1894년 그의 아들인 조강환(현 소유자의 증조부)세대 때 가문의 몰락으로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갔으나, 남의 농장의 머슴으로 살면서 돈을 모아 끝내 집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조강환은 큰아들 조희창에게 본집을 물려주고 1900년대에 둘째아들 조희경(현 소유자의 조부)과 셋째아들 조희양을 위해 현재의 차남댁과 삼남댁을 새롭게 지었다.

 

이렇게 힘든 역경을 거쳐 현재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은 현조부 조윤민을 시작으로 현 소유자인 조기상에 이르기까지 130여 년 간 7대가 이어져온 가옥이다. 장남댁, 삼남댁, 곳간채 2, 중문채, 행랑채, 대문, 문간채 총 8동을 2017년 일괄로 문화재로 등록됐다. 안타깝게도 차남댁은 소유권 문제로 등록되지 못했다.

 

삼남댁 곳간채 (사진 = CPN문화재TV)
삼남댁 곳간채 (사진 = CPN문화재TV)

 

김동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관해공 가옥은 1880년대부터 현대까지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관직과 대지주계급의 생활상이, 일제강점기에는 근대화의 선구자로, 대한민국 건국시에는 정치가로 이어온 가문의 전통한식 가옥이었다. 이는 시대적으로 큰 물결을 겪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천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주변이 모두 도시개발이 된 후에도 여전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전남 영광군의 근대문화의 상징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장구연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주무관은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은 한 울타리 안에서 3형제의 집이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이점이다. 원래 세 집의 사랑채는 차남댁과 삼남댁이 장남댁의 형태를 따서 거의 같으나, 안채에서 차이점이 있다. 일반적인 호남지방 상류가옥의 일반형과 다르게 T자형 또는 고패집형식(자형 집에 부엌이나 외양간을 직각으로 붙인 형태)으로 다른 근대가옥과는 차별화 되고 있다고 가옥의 문화재적 가치를 설명했다.

 

관해공 가옥에 머물렀던 인물들은 조선 말기시기에는 성균관 진사과에 합격해서 벼슬길을 걸었고,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전기회사를 만들어 국내의 산업근대화를 이끌었고, 대한민국에 와서는 국회의원으로 지내며 나라의 앞길을 걱정했다.

 

높은 빌딩들과 현대건물에서 제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영광 창녕조씨 관해공 가옥. 누군가는 낡은 기와집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130년의 격동의 시기를 함께한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로서 보호받고 기억해야 한다.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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