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열의 문화재칼럼] 춘래불사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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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열의 문화재칼럼] 춘래불사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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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1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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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제325-2호 흑기러기 (사진 = 문화재청)
천연기념물 제325-2호 흑기러기 (사진 = 문화재청)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 만은 세상사 쓸쓸하구나.~’

 

사철가가 절로 나는 봄이다. 그러나 연초부터 온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는 코로나19’의 광풍으로 사람들 마음은 봄을 즐길 여유가 없다. 이 또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여인이 있다. 이들의 경국지색은 침어낙안 폐월수화(沉魚落雁 閉月羞花)’라는 말로 표현한다. 달도 부끄러워 모습을 감춘다는 폐월(閉月) ‘초선’,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넋을 잃고 날개 짓을 잊고 땅에 떨어진다는 낙안(落雁) ‘왕소군’, 꽃이 부끄러워 움츠렸다는 수화(羞花) ‘양귀비’, 그리고 놀란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고 바닥에 가라앉았다는 침어(侵魚) ‘서시를 가리킨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 때 궁녀로 절세 미녀였다. 원제는 화공 모연수에게 모든 궁녀들의 얼굴을 그린 화첩을 만들게 했다. 궁녀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며 예쁘게 그려줄 것을 간청하곤 했지만, 도도한 왕소군은 그렇게 하지 않아 못생기게 그려진 탓에 왕의 눈에 들지를 못했다.

 

얼마 후 흉노왕이 한나라 여인으로 왕비 삼을 것을 청하자, 원제는 화첩을 보고 왕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그녀는 내키지 않은 오랑케 땅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때마침 기러기 떼가 머리 위를 날자, 그녀는 비파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오랑캐 땅은 화초도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그녀의 처연한 노랫가락에 모두 넋을 잃었고, 하늘을 날던 기러기도 날갯짓하는 것을 잊어버려 땅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낙안춘래불사춘이란 말은 여기서 유래한다. 1980년 봄 당시, 신군부의 서슬 퍼런 위세에 꽁꽁 얼어붙은 정국을 춘래불사춘이라 말해 인구에 회자(膾炙)되었고, 이후로 필객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 되었다.

 

나주 배꽃 (사진 = 나주시청)
나주 배꽃 (사진 = 나주시청)

 

배꽃이 물결치고 하얀 달마저 둥실 떠오르는 십오야. 나주 배 밭에서는 이화에 월백이란 주제로 마치 이백의 춘야연도리원(春夜宴桃李園)’을 연상하게 하는 봄밤의 향연이 펼쳐진다. 배꽃 필 무렵이면 자연스레 읊조리게 되는 이조년의 <다정가>.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銀漢)이 삼경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남녀 간의 그리움을 그린 시로 애송되고 있지만, 작자가 충혜왕의 방탕함을 충간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성주로 낙향하여 임금을 향한 충정과 연군(戀君)의 한을 담아 읊은 시조다.

 

이조년 형제는 다섯으로 큰형 백년(百年)부터 아래로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막내가 조년(兆年)으로 이름들이 독특하다. 오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고 형제 우애가 돈독하기로 이름이 나 있다. 공민왕 때 형제간의 우애를 위해 황금을 강물에 던져버린 형제투금(兄弟投金)’ 이야기도 억년과 조년 형제의 이야기다.

 

그래도 봄이 좋다

 

새색시 얼굴의 연지곤지를 떠오르게 하는 홍매와 백매를 시작으로 산수유, 벚꽃, 복숭아꽃, 개나리, 진달래, 철쭉, 유채꽃... 지리산 골짜기서 영산강을 따라 청산도에 이르기까지 온갖 꽃이 앞 다투어 피는 만화쟁발(萬花爭發), 남도 땅은 충만한 꽃 정원이자 열 두 폭쯤은 되는 수채화다.

 

옛 한량들이 세속에서 벗어나 행화촌(杏花村)을 찾아 상춘 시회(賞春 詩會)를 즐기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여긴 이유를 알 만하다.

 

경주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 (사진 = 경주시청)
경주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 (사진 = 경주시청)

 

꽃피는 것이 봄 날 뿐이런가. 한여름에 보란 듯 피어나, 장장 백여 일 동안 붉은 정열을 뽐내는 명옥헌 원림의 배롱나무 꽃 군락은 선경(仙境)이자 무릉도원이다. 송나라 주돈이가 유독 사랑했다는 연꽃도 여름에 만날 수 있는 꽃이다. 예쁘고 향기롭지만 요염하지 않고,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청아한 향기를 멀리 내뿜는다는 까닭을 말하며 연꽃을 예찬한다. () 씨는 땅 속에 천년을 묻혀 있다가도 싹을 틔울 만큼 단단한 껍데기를 갖고 있다. 때문에 껍데기에 상처를 내야 싹을 틔운다고 한다. 이처럼 어려움을 감내하는 연의 모습은 내가 연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급변한 기온 탓에 혹한, 엄동설한, 동장군이란 말이 겨울날씨를 대변하기에 무색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겨울이 지나고 약동하는 봄이 왔다. 만화방창(萬化方暢), 경칩을 전후해 생명체들이 때를 기다린 듯 땅을 박차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자연의 섭리는 어김없이 봄이다.

 

봄볕에, 봄꽃에 취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해이해지기 십상이다. ()는 해이해지고 나태해진 데서 생겨나고, 천하의 큰일이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되고, 모든 병은 적게 치료해서 더욱 커진다고 했다.

 

개구리는 달아나고 뱀은 개구리를 집어 삼키려고 뒤쫓아 간다. 죽느냐 사느냐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절체절명의 순간. 개구리가 빨리 도망갈수록 뱀은 일부러 천천히 간다. 이때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 개구리는 속도를 줄이게 되고, 결국 뱀에게 물리고 만다. 인간에게 닥친 재앙과 근심도 이쯤이면 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에서 비롯되니, 요즘 우리 사회의 이 혼란도 여기에 빗대 생각 한번 해 볼 일이다.

 

<주역>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窮則變 變則通)’고 했다. 천지만물은 변화유동(變化流動)하는 것이 진리인즉, 지금의 시련을 우리 모두는 슬기롭게 견뎌낼 것이다. 나무가 가장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해 오랫동안 추운 겨울을 기다린 것처럼.

 

글  대동문화재단 대표 조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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