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억 -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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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억 - 기와
  • 이경일
  • 승인 2020.03.12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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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어영청에 자리한 산사, 대성암 출토 기와 2

복합문이 새겨진 수키와는 2례가 출토하였는데 조선 후기와 말기에 성행한 기와류이다. 복합문수키와는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는데, 언강과 미구가 있는 유단식으로 표면에 창해파문과 짧은 선조(線條)가 복합되었다. 회흑색의 경질기와로 현재 길이와 두께가 각각 29.0cm, 2.0cm이다. 두 측면에는 안쪽에서 넣어진 분할도흔이 있고 이면에는 거친 포목흔적이 남아 있다. 다른 복합문수키와는 조선 말기의 작례를 나타냈는데 표면에 창해파문과 선조가 복합되어 새겨졌다. 회흑색의 경질기와로 일부가 파손되었는데, 기와의 길이와 두께가 각각 32.0cm, 2.5cm가량이다. 두 측면에 안쪽에서 얇게 넣어진 분할도흔이 있고 이면에는 거친 포목흔적이 있다.

조선 복합문 수키와
조선 복합문 수키와

 

집선문이 새겨진 수키와는 1례가 출토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다. 언강과 미구가 있는 유단식으로 소성온도가 높은 회흑색의 경질기와이다. 기와의 현재 길이와 두께가 각각 23.0cm, 2.0cm이고, 미구의 길이는 1.5cm가량으로 짧은 편이다. 표면에 새겨진 집선문은 밀집되었는데 창해파문이 선문으로 변형된 모습이다. 이면에 포목흔적이 있고 두 측면의 내측에 분할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집선문 수키와
조선 집선문 수키와

 

무문수키와는 1례가 출토하였다. 언강과 미구가 있는 유단식으로 표면이 매끄럽게 조정된 채 문양이 생략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회흑색의 경질기와로 현재 길이와 두께가 각각 14.0cm, 2.5cm가량이다. 한 측면에는 안쪽에서 넣어진 분할도흔이 있고 이면에는 거친 포목흔적이 있다.

조선 무문 수키와
조선 무문 수키와

 

조선시대의 암키와는 3례가 출토하였는데 표면에 창해파문과 집선문 등이 새겨졌고 무문양인 암키와도 있다. 창해파문암키와는 굵은 창해파문이 밀집되었는데 조선 전기의 작례를 나타냈다. 기와의 현재 길이와 두께가 각각 8.0cm, 2.0cm가량인 회흑색 경질기와로 이면에 거친 포목흔적이 있다.

조선 창해파문 암키와
조선 창해파문 암키와

 

집선문암키와는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는데, 변형된 창해파문과 단선이 복합되었다. 적갈색의 경질기와로 작은 파손품이다. 기와의 현재 길이와 두께가 각각 9.0cm, 21.8cm인데, 이면에는 거친 포목흔적과 포목의 가로 이기가 확인된다.

조선 집선문 암키와
조선 집선문 암키와

 

무문암키와는 1례가 출토하였다. 암키와의 표면은 매끄럽게 조정되었는데 문양이 생략되어 전술한 무문수키와와 조합된 것으로 간주된다. 회흑색의 경질기와로 현재 길이와 두께가 각각 13.5cm, 1.8cm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되었는데, 상단부의 일부가 남아있는 파손품으로, 이면에는 포목흔적이 있고 그 끝이 얇게 조정되었다.

조선 무문 암키와
조선 무문 암키와

 

고양 대성암에서 출토한 기와는 암·수키와인 기본기와가 대부분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제작되었다. 기와는 고려 초기 및 중기와 후기, 그리고 조선의 전·후기의 작례를 잘 나타내 그 문화재적 가치와 함께 제작시기의 다양함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기와와 조선 전기의 기와는 조선시대 숙종 37(1711)에 축조한 북한산성의 어영청 유영의 기와와 시기적으로 달라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고양 대성암에서 출토한 고려시대의 기와와 조선 전기의 기와는 관방유적인 북한산성과 무관하여 고려시대에 창건한 사원건축에 사용된 기와로 추정된다. 그런데 대성암에서 수집된 조선 후기와 말기의 기와는 관방유적인 북한산성의 어영청 우영의 기와로 간주된다.

 

기와는 표면에 새겨진 고판문양과 이면의 포목흔적 및 분할흔적에 따라 제작시기의 차이와 각 시대의 특색을 약간이나마 살필 수 있다. 고려시대의 암·수키와는 격자문과 우상문, 우상문과 격자문이 조합된 복합문이 주요한 고판문양을 이루었고, 조선시대에는 창해파문과 집선문 및 복합문이 새겨져 다양한 번와(燔瓦)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고양 대성암은 근대에 건립된 작은 암자로, 기와 이외에 도기편과 도자기편이 출토하였고 석조와 돌절구 등이 남아있다. 대성암은 전술한 바와 같이 아미타삼존 괘불도를 비롯하여 목활자본 묘법연화경, 선림보훈육경합부등 경기도의 지방문화재가 다수 소장되어 전통사찰로 지정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성암에서 출토한 기와는 고려 초기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여 그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하다. 고려시대의 기와와 조선 전기의 기와는 1711년에 축조한 관방유적인 북한산성의 어영청 유영의 기와와 무관한 것으로 사원건축의 기와로 추정되어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고양 대성암은 근대에 건립되었으나 고려시대의 사원건축을 계승한 사찰로 법등이 계속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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