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국보 및 보물을 포함한 총 문화재 건 수가 131점이나 된다. 물론 전부가 국가지정은 아니지만 지방 문화재를 포함하여 등록문화재 등 관리를 요하는 중요한 문화재들이다. 선사시대 지석묘를 비롯한 유의미한 문화재도 상당수 강화도에 위치하고 있다.
강화도에는 고대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굉장히 복합적으로 담아낸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강화도는 왕도이기도 했으나 유배지가 되기도 했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 많은 전란을 겪었지만 불교 및 유교 문화로서의 흔적도 담아내기도 하는 등 단순한 문화재의 수만이 아니라 종류도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왕도로서는 고려궁터가 위치한다.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1270년)에 사용하던 궁궐터로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 궁궐을 지었다고 하였다. 현재 강화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이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 1631년(인조 9)에 고려궁지에 행궁을 건립하여 국난시 이용하고자 하였다. 또한 강화유수부, 외규장각, 장녕전(萬寧殿), 만녕전(萬寧殿)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었다. 현재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명위헌(明威軒), 이방청(吏房廳) 등과 복원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 또한 강화유수부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장소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기도 한다.
또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서해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쟁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수많은 진보다 돈대가 조성되어 있다.
또한 유교의 한 학파로서 불교 및 도교까지 섭수(攝收)하고자 했던 강화학파의 중심지로서 유교 및 불교 등의 문화종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문화재도 다수 확인할 수 있는 문화재의 보고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다양한 문화재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서울 인근 지역에서 이토록 많은 문화재가 분포된 지역도 드물다. 웬만한 광역시 수준을 벗어난다. 하지만 문화재 관리에 투입된 인원은 팀장 포함하여 여섯 명이다. 그중 두 명은 전문학예사, 그러니 현장에서 발생하는 민원을 적기에 처리하기가 영 곤란한 지경이다.
더군다나 문화재 보호법에 다르면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범위는 해당 지정문화재의 외곽 경계로부터 약 500안까지가 그 범위에 해당한다. 또한 공사를 시행할 시 해당 공사가 문화재에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500미터를 초과하여 범위를 정할 수 있다.
따라서 강화군의 문화재 및 문화재 보호구역의 현황을 살펴보면, 강화군의 전체 면적보다 문화재의 보호구역이 더 넓은 상황이다. 적은 인원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나도 지역이 넓다. 따라서 인력의 충원 및 문화재 보호구역의 설정 문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것 으로 보인다.
인력의 경우 각 문화재의 성격도 크기도 다양하니 그만큼의 전문적인 인력을 투입하여 각 문화재별 보존방안, 관리대책 등을 세워 나가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문화재 보호구역의 경우 관리 문제 뿐 아니라 토지이용문제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각 문화재별로 보호범위를 성격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강화도는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양성을 가진 문화재들이 분포해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강화도는 그 중요성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의미를 가지고 불교 및 유교문화로서, 국가의 안보와 관련된 중요 행정 및 군사시설로서 역할을 수행해 온 문화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 교육적으로 많은 가치를 지닌 곳으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존해 나가야 한다.
취재팀 김민석 기자
kimminseok@icp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