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이 치열하게 항전했던 병인양요의 격전지 '문수산성'
상태바
선조들이 치열하게 항전했던 병인양요의 격전지 '문수산성'
  • 김민석 기자
  • 승인 2020.03.24 1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수산성 북문(사진=CPN문화재TV)
문수산성 북문(사진=CPN문화재TV)

 

 

강화도의 갑곶진(甲串鎭)을 마주보고 있는 해발 376m의 문수산(文殊)의 험준한 줄기에는 조선 말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문수산성(文殊山城)이 있다. 숙종 8(1682)에 강화유수가 강화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하여 12년이 지난 숙종 20(1694) 끝낸 산성이다.

 

원래는 문수산의 줄기에서 해안지대까지 연결된 포곡식의 산성이었으나, 현재 해안쪽의 성벽과 문루(門樓)는 없어지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의 본래의 것이 남아있다. 산성의 명칭은 문수사(文殊寺)에서 유래하였다. 현재 사적 제139호로 지정되 있다.

 

서울, 서해, 인천 강화도, 경기도 파주·김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한양 도성으로 향하는 해로의 방어 기지 역할을 했던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던 산성이다.

 

문수산성 북문(사진=CPN문화재TV)
문수산성 북문(사진=CPN문화재TV)

 

 

이 산성은 프랑스와의 병인양요가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고종 3(1866)에 병인양요 발발시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가기 위한 길을 확보하기 위해 문수산성으로 향했다.

 

이 때 문수산성은 김포출신의 봉상시사(奉常寺事) 한성근(韓聖根)이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광주(廣州)의 별파군 50명을 이끌고 수비하고 있었다. 한성근은 기습을 통해 잠시 프랑스군이 물러나게 하기도 했으나, 프랑스군의 물량과 무기의 열세를 버티지 못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문수산성 성곽(사진=CPN문화재TV)
문수산성 성곽(사진=CPN문화재TV)

 

 

그리고 프랑스군이 문수산성을 점령한 후 성 내의 민가 29호를 불살라 버렸다. 이 과정에서 해안 가의 성벽과 문루 등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최근에는 이 문수산성의 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將臺)가 복원되고 개방되었다.

 

이 장대는 1990년대에 들어서 학술조사를 통해 원형을 찾았고, 그것을 토대로 201511월에 김포시에서 착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20175월 복원에 성공하고 공개되었다.

 

문수산성은 병인양요 때 선조들이 외세로부터 항전을 펼친 격전지로서 계속해서 연구하고 복원함으로서 선조들의 정신과 의지를 되새기는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취재팀 김민석 기자

kimminseok@icp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