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목수 쌍두마차, 두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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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목수 쌍두마차, 두 사람의 이야기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4.08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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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목수 조원재, 사찰목수 김덕희. 그 계보를 살펴보다

 

우리나라는 목조건축이 발달한 국가로 궁궐과 사찰건물 대부분이 목조였다. 이에 목조를 다루는 목수들의 중요성은 상당했고, 통일신라시기부터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벼슬을 주어 후하게 대접했다. 특히, 조선 세종시기 때 숭례문 재건기록에 의하면 대목장이가 정5품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대우가 대단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고, 이에 따라 목수들의 삶도 상당히 힘들어졌다.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닌 막노동자로 인식되었으며, 하나의 건이 생기면 전국의 목수가 모여들 정도였고, 나무상자에 인장을 넣고 떠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았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목수들이 큰 날개를 펼쳤다. 바로 한국 목수계의 쌍두마차라고 불리는 조원재와 김덕희가 그 주인공이다. 조원재는 궁궐 위주로 건물을 지었고, 김덕희는 사찰을 위주로 건축을 했다.

 

조원재가 도편수로 맡아 완공된 1965년 숭례문의 모습 (사진 = 문화재청)
조원재가 도편수로 맡아 완공된 1965년 숭례문의 모습 (사진 = 문화재청)

 

- 숭례문을 재탄생시킨 조원재

 

조원재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한 숭례문 해체·수리공사에 참여했다. 문화재계의 조상이라 불렸던 임천 선생이 그에게 도편수(총 책임자 목수)를 맡겼고, 그의 제자 이광규(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에게 부편수를 맡겨서 진행했다.

임천 : CPN문화재TV 보도 문화재터뷰 21편 주인공인 김동현박사의 스승

 

숭례문 복원공사는 국보1호를 수리하게 된다는 상징성과 당시 열악했던 목수들의 상황이 덧붙여져서 전국 수백 명의 목수들이 참가했다. 현재 1~2명의 목수와 기계로 이루어지는 공사 현장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이광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목수들도 함께 동원시켰는데, 거기에는 훗날 1975년 수원 화성 장안문을 복원한 대목장 정대기와 평택에서 미군기지 주택을 짓던 박광석 등이 함께했다. 박광석의 심부름꾼이었던, 대목장 보유자인 신응수도 참여했다.

 

모두의 노력으로 보수된 숭례문은 대한민국의 상징이자 국보1호로 사랑받았다. 안타깝게도 2008년 화재로 인해 무너졌으나, 2013년 다시 우리의 앞에 복원됐고, 문화재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국보 제56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 (사진 = 문화재청)
국보 제56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 (사진 = 문화재청)

 

- 조원재로부터 이어져온 궁궐목수 계보

 

전통건축이 본격적으로 나라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82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로 대목장이 지정되면서부터다. 이때 보유자 중 한 명이 이광규였다. 이광규는 조원재의 제자로 위의 숭례문 보수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 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보유자로 인정받은 지 불과 3년 후인 1985, 송광사의 제8차 중창 작업을 하던 중 사고로 사망한다.

 

이광규의 직속제자인 조희한 목수 역시 작업 중 사망하게 되어 제자의 자리는 공석이 된다. 그 빈자리에 대목장 보유자 신응수가 자신이 이광규의 제자임을 자처했다. 조원재의 큰아들은 이에 신응수 목수가 본인의 대스승 조원재의 작업장을 드나들었다고 증언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작업현장에서 신응수가 함께 작업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진술한 상황이다.

 

국보 제49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 (사진 = 문화재청)
국보 제49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 (사진 = 문화재청)

 

- 사찰 목수의 대가 김덕희, 그의 계보는?

 

일본인 목수 이케다(池田)를 이기고 1937년 국보 제49예산 수덕사 대웅전해체보수공사의 도편수를 맡은 김덕희. 당시 수덕사에 있던 만공스님은 왜놈에게 우리의 건물을 맡길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이에 김덕희와 합심해 도편수 자리를 지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 후 월정사 대웅전 보수공사가 진행되었다.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은 김덕희는 이번에도 도편수로 자리 잡고, 그의 명성을 들은 목수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모이게 된다. 그곳에는 대목장 보유자인 최기영전흥수도 끼어있었다.

 

그 중 최기영은 김덕희의 동생 김중희의 조바(여관에서 일을 하던 하인)였다. 당시 김중희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이응로 선생 사적지내부에 있는 수덕여관을 관리했다. 그는 목수는 아니었으며, 관리인에 가까웠다. 형 김덕희의 월정사 대웅전 보수공사 소식을 듣고 도와줄 심부름꾼으로 최기영을 보낸 것이었다.

 

김덕희의 정통계보는 큰아들인 김윤원에게 이어진다. 김윤원은 이를 김범식에게 전수한다. 김범식은 2015년 경북 무형문화재 제37대목장의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김덕희가 도편수로 활약한 김천 직지사를 시작으로 전수과정을 이어받았다.

 

또 다른 제자로는 김달원 대목장이 있었다. 김중희와도 연이 깊었으며, 김덕희를 도와 월정사 대웅전 복원작업을 함께 하며 목수 일을 배웠다. 그 후 1975년 광덕사 천불전(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47호로 지정)의 옛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많은 이들이 김덕희의 가르침을 받은 김달원이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목수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보유자인 전흥수의 목자재창고에서 자재에 깔려 사망하고 제자가 없어 그 계보가 끊어지고 만다.

 

이렇게 한국 목수계의 쌍두마차인 조원재와 김덕희의 계보를 살펴봤다. 현재는 문화재수리 도편수로 활약하면 부와 명예가 함께하는 직업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는 막노동과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천대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건축에 대한 계보를 잇고, 전통을 지킨 도편수들에게 무한한 찬사가 쏟아지지 않을 수 없다.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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