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茶는 중국의 아류? 오히려 중국에 차종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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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茶는 중국의 아류? 오히려 중국에 차종 전래!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4.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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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한국 차 문화, 김교각 스님이 다리가 되다!

 

흔히 문화의 발상지라고 하면 중국을 떠올리고, 우리의 차 문화 역시 중국과 유사함을 넘어서 아류작이 아닌가하는 저평가되는 시선이 많다. 사실 우리나라는 보성을 비롯해 질 좋은 차를 많이 생산하는 국가이지만, 정작 차를 우려 마시는 문화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런 시각은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을 받으며, 중국과의 접점이 늘어났고 그 영향권을 벗어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경주 기림사 주지 영송스님은 이러한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하며, 한국의 차 문화는 인도에서 건너온 정토 불교와 함께 온 급수봉다(汲水奉茶)”의 문화라고 언급했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252호 '경주 기림사 약사전' 내부 헌다 벽화 (사진 = 경주 기림사)
경북 문화재자료 제252호 '경주 기림사 약사전' 내부 헌다 벽화 (사진 = 경주 기림사)

 

- 한국의 차 문화 급수봉다(汲水奉茶)’는 무엇인가?

 

급수봉다를 직역하면 물을 길어서 차를 바치다라는 뜻이다. 헌다의식(獻茶儀式)이라고도 불리며 물을 길어서 차를 우린 후 바치는 문화다. 이는 중국 및 일본의 차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차별성을 띄는 한국의 차 문화의 정체성이다.

 

영송스님은 경북 문화재자료 제252호 경주 기림사 약사전에는 1654년 중창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 헌다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내 헌다 벽화로, 서천국의 왕 사라수왕이 급수(물을 긷는 행위) 소임을 맡아 광유 성인께 헌다하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또한, “기림사의 사적기와 중창기에도 급수봉다의 차 문화가 기록되어 있다. 기록 속에 등장한 광유 성인은 범마라국(인도)의 스님으로 643년 경주 기림사(당시 이름은 임정사)를 세웠다고 언급되어 있다. 거기에 몇 천 년에 한번 핀다는 한약초 우담바라(인도의 뽕나무)’가 있었다는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를 통해 신라와 인도간의 불교적 문화교류가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과 함께 해양의 실크로드를 개척한 신라인의 기상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우리가 중국으로 차종을 전래, 삼국사기 지리산 전래설보다 100년 앞서

 

영송스님은 중국이 우리에게 차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우리가 중국에게 신라의 차종을 전파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문헌의 역설을 통해서 그 사실이 밝혀졌으나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설명했다.

 

신라의 차를 중국에 전래한 주인공은 바로 ()교각스님이다. 교각스님은 신라의 왕자 출신이었으나, 출가해 당나라에서 수행을 해 중국에서는 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중국의 청양현지(靑陽縣志) 기록에 따르면 從西域茶種携帶來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기록은 흔히 중국이 주장했던 지리산에서 중국의 차종이 전래돼서 한국에 퍼졌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무려 100여년 앞선다. 중국 구화산에서 교각 스님이 공경차(금지차)라는 서역 차종을 휴대해 왔다는 뜻으로 오히려 중국이 주장했던 지리산 전래설이 역설임이 밝혀진다.

 

2007년 경주 불국사에 봉안된 김교각 스님 상 (사진 = 경주시청)
2007년 경주 불국사에 봉안된 김교각 스님 상 (사진 = 경주시청)

 

- 왕자가 아닌 승려로 살아간 김교각

 

교각스님이 정확히 어떤 왕의 자손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비관경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내용으로 유추해보면 697년 신라 제32대 효소왕 시기 서라벌 궁전에서 태어난 김중경이며, 아버지는 제33대 성덕왕(당시 흥광대군)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24살의 나이에 출가해 당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신라 진골 출신 왕자가 무슨 이유로 출가를 결심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붓다처럼 왕족으로서의 삶에 회의감이나 부귀영화의 부질없음을 느꼈기 때문일까. 권력다툼에 지쳐서일까. 그는 왕자로서의 삶을 끝내고 새롭게 수행자로서의 삶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김중경에서 김교각이 되어 중국 주화산의 화성사에서 자리를 잡고 수행에 들어간다. 75년간의 수행을 진행했으며, 99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게 된다. 그 육신이 3년 동안 썩지 않았으며, 이를 본 승려들이 그를 중국 4대 보살 중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대했다.

 

경주 기림사의 오종수 (사진 = 경주 기림사)
경주 기림사의 오종수 (사진 = 경주 기림사)

 

현재까지도 중국의 사찰에 방문하면 교각스님의 상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중국의 구화산 성지는 김교각 테마로 연 5천 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할 정도로 문화관광자원화를 뛰어나게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신라의 왕족 출신 승려임에도 중국의 승려로서 더 알려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현재 경주 기림사는 오종수(五種水)를 비롯한 절 내부에 차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위치해 있다. 급수봉차와 함께 신라 왕족 출신 승려 김교각 스님의 문화적 스토리텔링을 잘 활용해서 우리의 문화를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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