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태어난 문화재, 製瓦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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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에서 태어난 문화재, 製瓦匠 3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4.23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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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가 들려주는 이야기, 그 마지막

 

기와를 굽는 장인 제와장,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88한형준 보유자였으며, 그는 20136월 타계한다. 그 후 2019년 전수교육조교였던 김창대 씨가 보유자로 인정됨으로써 전통기와의 맥을 이어가게 될 수 있었다.

 

70년 넘게 기와를 구워낸 한형준 보유자. 그의 생애 마지막 기록인 아따, 그 양반 기와 좋다’(20135월 채록)에는 기와와 함께했던 삶의 이야기가 녹아있다. 원래 7차례 구술채록을 진행하려했으나 보유자의 건강악화로 인해 5차례의 기록만 실리게 되었다.

 

본인의 기와가 칭찬받고 그로 인해 제자들이 잘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말을 남긴 한형준 보유자. 기와와 함께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2019년 발간된 故 한형준 보유자 구술 자서전 (사진 = 문화재청)
2019년 발간된 故 한형준 보유자 구술 자서전 (사진 = 문화재청)

 

- 이모부를 따라 기와를 배우다

 

보유자는 1929년 생으로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해서 주로 외가에서 자라났다고 한다. 194214살이 되던 해 이모를 만나러 보성에 갔고 그곳에서 이모부이자 스승인 최길수 씨를 만난다.

 

최길수 씨는 보성에서 이름난 제와장이었다. 보유자는 이모부의 밑에서 허드렛일을 비롯해 기와 만드는 일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람도 흙도 귀한 시기였기 때문에 10년 치를 3년 만에 익혀서 기와를 구웠다고 하니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17살이 되던 해, 광복을 맞이한다. 최길수 씨는 해방 후 늘어난 기와 일에 정식적으로 보유자를 일꾼으로 고용하게 된다. 당시 하루 삯이 쌀 닷 되었는데, 보통 일꾼의 5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모부와 이모가 장흥으로 일을 하러 떠나게 되고, 보유자도 함께한다. 그 후 나주는 명절 때나 가게 되고 사실상 장흥에서 기와를 굽는 삶을 시작한다.

 

- 전쟁 중에 땐 첫 불

 

1950,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진다. 이에 전쟁 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기와를 해결을 보기 위해 가마에 불을 때게 된다. 이것이 보유자가 단독적으로 처음 행한 불 때기였고, 불 잘못 때면 살림 하나가 거덜 난다고 할 정도로 신중한 작업이었기에 매우 부담됐었다고 한다.

 

기와공장의 사장이 단독적으로 맡겼던 일이었다. 보유자는 불의 모양과 색만 보고서 불을 땠는데 다행스럽게도 기와가 매우 잘 나왔다고 한다. 그 후 이모부에게서 정확하게 나무와 불에 대한 방식을 자세하게 배웠고, 이모부 최길수 씨는 광주로 돌아가고 한 달 뒤에 소천 했다.

 

전남 장흥에 있는 故 한형준 보유자의 기와 가마 (사진 = CPN문화재TV)
전남 장흥에 있는 故 한형준 보유자의 기와 가마 (사진 = CPN문화재TV)

 

- 새마을운동 이후 몰락한 전통 기와

 

보유자는 1951년에 혼인했고, 얼마 되지 않아 영장이 나온다. 3년 동안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가 제대했으며, 장흥의 기와공장에 취직해 일을 시작한다.

 

새마을 운동 전에는 전통기와의 수요가 제법 되었고, 인부도 20명 가까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지붕개량을 해서 기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으나, 시멘트기와와 슬레이트가 도입되면서 전통기와사업이 쇠퇴한다.

 

장흥은 원래부터 흙이 좋고 예전부터 있던 단골 수요 덕에 명맥을 유지했으나, 대부분의 전통기와 공장들은 문을 닫고 인부들도 떠나버렸다고 한다.

 

-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다

 

1980, 문화재 심사를 위해 장흥 공장에 위원들이 방문한다. 새마을 운동 이후 몰락해버린 전통 기와 작업장 중 유일하게 남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유자는 대부분의 공장 일을 도맡아했었고, 17살부터 기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91호 제와장의 보유자가 된다.

 

보유자가 된 후 여러 지역에서 전시와 출품 작업을 진행했으며, 때로는 먼 해외에서도 한국의 전통 기와를 보기 위해 작업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1990년대에는 미국 UCLA 대학에 가서 실습수업도 진행했다.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진행한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청와대 초청행사에 참여해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만난 전라남도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들과 문화재 모임을 형성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2009년 당시 수막새를 제작하는 ​故 한형준 보유자 (사진 = CPN문화재TV)​
2009년 당시 수막새를 제작하는 ​故 한형준 보유자 (사진 = CPN문화재TV)​

 

- 문화재가 되었으나 쉽지 않은 생활

 

문화재로 인정받게 되었으나 삶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기계식 기와와 가성비 경쟁에 밀렸으며, 작업 속도가 너무나도 차이 났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부업이 불가능해졌다는 점도 컸다.

 

제와장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어려운 작업 환경, 적은 수입 등으로 대부분 일을 배우다가 떠나갔다. 보유자는 전통 문화에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주변 환경이 떠나가게 하는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었다.

 

- 제자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킨 직속 제자는 제와장 전수교육조교 김창대 씨와 이수자 청훈 씨였다. 특히 김창대 씨는 안정적이던 공무원 직장에 사표를 내고 제와를 배우기 위해 뛰어들었다.

 

1998년부터 보유자가 눈을 감을 때까지 김창대 씨는 전통기와 기술을 쉴 틈 없이 배웠다.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작업장이 많이 훼손되자 복구하는 일에도 크게 힘썼다. 두 제자가 보유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보유자는 제자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고 한다.

 

2013년 5월 4일 진행된 숭례문 복구 기념식 (사진 = 문화재청)
2013년 5월 4일 진행된 숭례문 복구 기념식 (사진 = 문화재청)

 

- 생애 마지막 작업, 숭례문 복원

 

2008, 나라가 큰 슬픔에 빠진다.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재로 인해 큰 손상을 입은 사건으로, 기와는 95%가 파괴가 되어 처음부터 새롭게 복구를 했어야 했다. 문화재청은 회의를 통해 복원을 전통기와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보유자가 일을 맡게 됐다.

 

고령의 나이, 달라진 작업환경, 3만 장에 달하는 기와 양 등으로 작업은 쉽지 않았다. 보유자는 두 제자가 없었다면 일을 시작도 못했을 것이라며 힘든 작업이었음을 토로했다. 수년의 작업 끝에 20135, 숭례문에 본인이 만들어낸 기와가 얹어지는 것을 준공식에서 보게 된다.

 

한 달 뒤, 숭례문이 본인의 마지막 역작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눈을 감는다. 문화재청은 보유자의 구술채록을 사망 한 달 전에 실시했으며, 이를 엮어서 2019년에 채록집 아따, 그 양반 기와 좋다로 발매한다.

 

아따, 그 양반이 해서 (기와) 잘되어서 우리 좋다라는 소리를 듣는 게 소원이지.

(중략) 우리 제자들만 하여튼 잘되게만 해 주면 그 이상 나는 바랄 것이 없어요.”

 

문화재청 발간 아따, 그 양반 기와 좋다’  

한형준 보유자가 남긴 소망

 

보유자가 소천한 후 6년이 지난 2019. 전수교육조교이자 마지막 숭례문 작업까지 함께했던 김창대 씨가 새롭게 보유자로 인정됐다. 보유자의 소망이었던 제자들이 잘되게 해달라는 말처럼 숭례문 복원 사업으로 인해 전통기와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새로운 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비가 오면 기와색이 달라지니 그것을 잘 살펴보라 말한 한형준 보유자. 우리가 늘 지나치던 숭례문의 기와를 한 번 쯤 확인하며, 그가 남긴 마지막 유산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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