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탑, 근현대의 역사가 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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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탑, 근현대의 역사가 담기다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6.09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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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253호 ‘서울 구 러시아 공사관’에 가다
사적 제253호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 (사진 = CPN문화재TV)
사적 제253호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 (사진 = CPN문화재TV)

 

덕수궁과 배재고를 지나면 정동길 끝자락에 위치한 정동공원. 창덕여자중학교와 중구청 공원녹지과의 관리로 쓰레기하나 없이 정갈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전체를 걷는데 5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작은 공원. 그 옆으로 현대식 탑 하나가 홀로 서 있다.

 

탑은 사적 제253호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으로 우리에게는 ‘아관파천’의 장소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1890년 러시아인 사바탄이 설계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순종과 함께 1896년부터 1년 간 덕수궁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 왕이 머물렀던 장소로서는 매우 협소한 공간이었음에도 고종은 전혀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았다는 상궁의 증언으로 보아, 명성왕후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막대했고 그만큼 불안감도 깊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 러시아공사관에서 바라본 정동공원 전경 (사진 = CPN문화재TV)
구 러시아공사관에서 바라본 정동공원 전경 (사진 = CPN문화재TV)

 

2019년 덕수궁의 뒷길부터 정동공원까지 이어진 ‘황제의 길’이 고종 승하 100주기를 기념해 조성됐다. 순종과 아관파천을 할 당시에는 지하의 길을 통해 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지하 통로는 막혀있고 일반인의 출입 또한 불가한 상황이다.

 

한 나라의 국모가 무뢰배에 의해 시해되고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절망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채, 왕이 궁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공사관으로 도망해야 했던 아관파천은 우리의 근현대사에 큰 충격과 슬픔을 남겨놓았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는 고종이 공사관에 머무르며 보호받고 있다는 명목으로 여러 정치적·경제적 이권을 약탈했으며, 조선 내부에서도 친일파와 친러파 간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등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웠던 시대였다.

 

1896년에 촬영된 구 러시아 공사관 (사진 = 중구청)
1896년에 촬영된 구 러시아 공사관 (사진 = 중구청)

 

이러한 격동의 역사가 담긴 러시아 공사관은 원래 2층 건물에 침실, 부엌, 서재, 식당, 무도회장 등이 있는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고종과 순종이 썼던 지하 통로와 밀실도 아직 지하에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러시아와의 외교장소로 쓰이다가 1948년 북한에서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쓰지 않는 폐건물로 남게 되었다. 

 

6.25전쟁으로 지금 남아있는 탑도 반파됐었으며, 대부분의 건물들이 모두 파괴되었다. 현재의 탑은 1972년에 복원했으며, 2009년에 정동공원과 함께 새롭게 정비가 완료되었다. 

 

공원은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며 매해 10월마다 ‘정동야행’이 진행돼 조명이 비추는 공원과 공사관 탑을 볼 수 있는 색다른 경험도 가능하다. 근현대의 혼란스러움을 간직한 채 빌딩과 공원 사이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공사관. 공사관 언덕에서 둘러보는 정동의 모습은 아름다움 속에 역사적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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