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지역 수군 지휘부 사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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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지역 수군 지휘부 사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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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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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성」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예고


문화재청은 충청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위치해 있는 충청남도기념물 제9호인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을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면적 125,092.지정 예고했다.



충청수영은 천수만 입구에서 육지쪽으로 뻗어 들어간 좁고 긴 만안(灣岸)에 위치하며 오천성이란 이름으로 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보령시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성의 길이는 1,300m이며 높이는 3~3.5m, 총면적은 87,678㎡ 이다. 백제 때에는 중국, 일본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로 알려져 있다.고려 때부터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군선(軍船)을 두었다.





충청수영성 항공사진(보도자료)


당초 이 지역에 토성이 있었으나 1509년(조선 중종 4) 수군절도사 이장생(李長生)이 돌로 다시 쌓았으며 완공하는 데 총 16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사방에 문을 두었고 영보정(永保停)·망해루(望海樓)를 설치하여 바다와 주변의 섬들까지 살피는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후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될 때까지 운영되었으며, 그 규모가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 수가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하였고, 근대에는 이양선 감시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 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하였다.당시 성에는 문 4개소, 연못 1개소, 건물 40동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서문 1개소와 장교청(將校廳)·진휼청(賑恤廳)·공해관(空海館) 등 관아 건물 3동이 남아 있다.





진휼청





충청수영성





충청수영성 서문 홍예


충청수영성은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서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사진자료 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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