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보련이의 대결이 만든 수려한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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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보련이의 대결이 만든 수려한 산성
  • 이경일
  • 승인 2020.06.2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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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400호 충주 장미산성 (忠州 薔薇山城)

중원문화권 지역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다 접경이 없는 지역 충주. 한반도의 지리적 중심에 위치하여 남과 북, 동과 서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교통 발달과 산물의 중심지로, 시대마다 국가마다 관심지역이 되었던 충주는 많은 산성이 축조되어 역사적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적 제 400호 충주 장미산성은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충주 장미산성 남쪽 성벽(사진=문화재청)
충주 장미산성 남쪽 성벽(사진=문화재청)

 

장미산성은 대부분 기단을 두지 않고, 지면 혹은 석반을 그냥 다듬은 위에 성벽을 쌓았고, 아래쪽으로 위로 오르는 하부에 약간씩 들여쌓거나 현저히 들여쌓은 좁은 단부를 둔 예가 있으며, 산 정상부나 등성이 부분보다는 외향 비탈면의 상부를 지나도록 축성되었다. 성벽 통과 지점 사이의 높이 차가 심한 것은 중부이남지역의 고대 유적으로는 보기 드문 예라고 한다.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성의 남으로는 국보 제205중원고구려비가 있고, 북서쪽으로 보물 제1401봉황리 마애불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 외에도 옛 절터흔적도 여럿 보이며, 장미산성 부근이 삼국시대에 내륙지방의 남과 북을 잇는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장미산성이란 이름과 관련된 우리 민족 고유의 남아선호 사상이 담긴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삼국시대 노은면 가마골 부근에 장미라는 남동생과 보련이라는 누이가 살았는데, 명산의 정기를 타고난 남매는 태어날 때부터 장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관례에 따르면 한 집안에서 장수가 둘이 출생하면 그중 하나는 희생을 당해야 한다는 숙명이 있었고, 남매는 성장하면서부터 운명을 정하는 방법을 상론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성쌓기 내기를 하게 되었단다. 같은 분량의 다듬어진 돌을 가지고 규정된 규모의 성을 쌓는 것으로, 생사의 결판이기도 한 것이다.

 

보련은 노은에서, 장미는 가금에서 성을 쌓기를 시작하였다. 남매의 어머니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속도가 아들 장미보다 딸 보련이 능숙하게 쌓고 있으므로, 아들 장미에게 마음이 컸던 어머니는 떡을 해가지고 보련에게로 갔다. 배도 고프고 피로했던 보련은 떡을 맛있게 먹고 다시 쌓기 시작해서 마지막 돌 한 개를 가지고 올라가는 중에 장미 쪽에서 축성이 끝났다는 북소리가 울렸고, 결국 내기는 아들 장미가 이겼단다. 이에  보련이가 성을 쌓던 산을 보련산, 쌓은 성은 보련산성으로 불렸으며, 장미가 성을 쌓던 산을 장미산, 쌓은 성은 장미산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충주 장미산성(사진=문화재청)
충주 장미산성(사진=문화재청)

 

충주의 장미산성은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성곽을 따라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어지는 옛 길에서, 삼국시대 충주의 전성기가 새록새록 느껴지는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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