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 찾은 청자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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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찾은 청자의 빛!
  • 관리자
  • 승인 2009.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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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의 획기적인 발견은 유약이다. 유약이 태토(胎土, 그릇의 형태를 이루는 점토)와 밀착되어 표면은 매끄러우며 단단하게 만들어지게 된다. 기본적인 재료는 흔히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흙, 물과 불이다. 흙은 그 성질 다양하여 수많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토양의 형질을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를 거쳐 청자와 백자를 만들기 위해 도공들 또한 수많은 세월를 땀과 노력의 결실로 고려청자라는 시대적 유산을 남기게 되었다.





▶과일무늬 주전자


여기에 청자 도공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준 정수사(淨水寺)가 있다. 고려도공들은 수많은 세월을 고려청자를 만들기 위해 어렵고 힘든 삶에 대한 고통을 이기기 위해, 가족의 건강을 위해 정수사를 찾았다. 정수사(淨水寺)는 고려시대 9세기~14세기에 걸쳐 고려청자를 굽던 도공들이 청자를 굽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좋은 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부처님께 공양과 불공을 드리던 곳이었다,




▶정수사(淨水寺)


고려청자의 절정에 이른 시기는 고려시대 10세기부터 13세기 초까지이다. 청자를 살펴보면 각기 따른 기법을 사용했다. 확연한 차이점은 청자의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무늬가 없거나 압출양각기법의 무늬가 있는 것과 비색 유약의 사용한 순청자 그리고 상감기법처럼 색이 다른 무늬가 있다. 철화청자는 철분성분의 흙으로 마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검정색을 띤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상감청자는 무늬 부분을 파낸 부분에 구웠을 때 흰색과 검정색을 띠는 흙을 넣어 그 무늬가 가늘고 섬세함을 표현 했다. 상감기법은 청동기에 은을 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은입사(銀入絲)기법이다.



상감청자로는 고려시대 말 14세기 주요생산품이었다. 상감청자는 제작시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무늬를 새기는 도장을 이용했다. 처음에는 보조무늬 부분에 일부 사용되다가 고려 말에는 도장만으로 무늬를 상감하였다.




▶청자박물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 위치한 강진청자박물관은 1997년 9월 3일 지상 1·2층으로 1층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2층은 시청각실, 도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에 전시 되고 있는 청자 완제품 175점과 파편 3만여 점은 강진군 일대 188개소 청자가마터 지표조사 유물이다.



청자가마터는 1960년대 초부터 가마터의 중요성과 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강진군이 고려청자사업소를 1986년에 개소, 소규모의 전시관을 신축하여 운영하였으나 다량의 청자를 보관·전시하기 위해 전시관 자리에 강진청자박물관을 건립했다.



강진청자박물관 건물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가마터 자리는 1980년대에 발굴된 용운리10-4호 청자가마와 1970년대에 발굴·조사된 사당리41호 가마터가 있어 고려시대 청자가마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도록 따로 전시관을 두고 있다.





▶청자를 굽던 가마터


강진 청자가마터는 대구면 일대 약 19,000㎡에 분포한다. 청자 가마터의 핵심은 대구면 일대로 특히 용문천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바다와 접해 있어 해로를 통한 운송이 쉬웠던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고려 전시기에 걸쳐 가장 우수한 도자를 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가마터는 용문천 상류인 용운리에서 시작하여 사당리까지 분포하고 있다. 용운리는 운곡과 항동, 용문마을로 이루어졌으며 80기의 가마터가 있다. 용운리 가마는 대부분 10세기 전반부터 11세기 중엽의 고려 초기 가마들로 청자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또 계율리의 59기의 가마터는 대체로 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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