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차(茶)의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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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차(茶)의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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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7.0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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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은 예로부터 야생차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나는 곳이다. 해풍(海風)을 맡고 자란 차는 향이 곱고, 신색이 훤했으며, 음다(飮茶)의 풍미가 절로 느껴져 차를 아는 사람은 곧잘 찾았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에는 찻그릇을 굽는 가마가 숱했다. 

 

물론 임진왜란의 여파 많은 도공들이 왜놈들에게 잡혀갔지만, 그래도 차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고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아이 같은 마음을 가져라' 라고 혜장선사에게 아호를 내렸지만, 혜장의 성징은 인근 해남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괴팍했다. 

 

세수(세속의 나이) 30살에 대흥사 강백이 되었으니 위아래가 없었고, 학문이 그만큼 일취월장했으니 학덕과 지혜를 누구와 나누었으리, 오로지 유아독존 미생미거(未生未擧)에 탁옹이 되려한 자 혜장스님에게 성에 차지 않을 터. 다산이 일부러 찾아간 길에 ‘이 촌로에게 안하무인 강설했으니 저런 무불이 있나.’라며 뒤돌아왔다.   

 

그러자 반시도 되지 않아 북암에 다다랐을 때 혜장이 쫓아 나섰다. ‘선생은 어찌 저를 속이시려 하십니까.’ 라며 다산의 손을 잡아끌고 백련사로 돌아가 하룻밤을 보낸다. 이 때 나눈 대화가 역(易)이었다.

 

비단 역이 대화의 주제였을까? 아니다, 혜장에게는 차가 있었다. 만덕산 자락에서 풋풋하게 올곧게 솟아난 야생 차. 둘은 차를 나누었고, 주역을 나누었던 것이다. 차에 허무주의 불교의 경학 ‘空’사상에 회의를 느껴 유교경전까지 통달한 학승 혜장은 다산을 만나 이처럼 주역을 토론하면서 지식의 허기를 달랬다. 

 

둘은 밤새 토론했다. 물론 밤새 차와 곡차를 나누었다. 말 그대로 차곡차곡(茶穀茶穀) 이날의 인연으로 다산은 한국의 야생차에 대하여 경탄했다. 중국 차와는 다른 깊이가 있었다. 해동 토요의 살점을 우려 나눈 차에는 맑은 물과 순결의 향기가 흘렀다. 

 

어쩌다 다산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읍내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길보다는 고성사로 가는 우두봉(牛頭峰)에서 주로 만났다. 그러다 내친 김에 고성사에 방 한 칸을 들였는데, 그곳이 바로 혜장이 만들어준 거처 보정산방이었다. 

 

이후 둘은 자주 만난다. 풀밭에 앉아서 하루 종일 선문답을 주고받듯이 대화를 나누었다. 비가 오는 줄도, 허기가 지는 줄도 몰랐다. 

 

더불어 아암은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차를 공양한다. 어쩌다 차를 보낼 시기가 늦어지면 다산은 차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는 글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 소위말하는 걸명소(차를 구걸하는 시를 짓다)다. 

 

해남의 초의 스님과도 사제의 정을 나누던 시기로 모든 스님들을 소개한 사람은 바로 혜장스님이었다. 35살 나이에 이미 초탈하여 의발을 맡겼던 아암 혜장 스님. 그러나 그의 삶은 그리 편안하지 못했다. 

 

세수 41살에 곡차를 마시고 체기를 다스리지 못해 열반에 든다. 다산은 친히 묘비명을 지어 아암 혜장선사를 그리워하는데, 세수가 9살이나 위의 형이었던 다산이 유배시절 그 우울함을 견뎌냈던 시기였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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