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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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혼!
  • 관리자
  • 승인 2009.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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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호가 노래한 추억의 백마강이라는 노래가 있다.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비경의 고란사를 마주한다. 백제 역사의 마지막 종착점, 부여 백마강은 국토의 4대 젖줄 금강으로 예로부터 비단결이 넘실거린다 하여 금강이라 불렀다. 이 백마강을 산허리에서 굽어보는, 부소산을 휘감고 도는 물길에는 황포돛대와 백제 패망의 상징인 낙화암이 허망한 듯 물길을 굽어보고 있다.






▲ 낙화암


고란사, 낙화암에서 백제와 그 명운 같이한 3천 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사찰이라는 설과 백제 후기에 지어진 사찰이라는 설이 양분하고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절 뒤 바위틈에 고란정은 그 자태가 아름다워 절을 찾는 이들에게 단골로 사진 찍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위쪽 바위틈에 드문드문 나 있는 고란초가 단아한 사찰과 배경으로 이색적이다. 고란사는 백제의 옛 땅에 백제의 운명처럼 그렇게 쓸쓸하게 부소산 산 중턱에서 금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 고란사


황포돛배가 물길을 휘저어 나가고 방초의 수많은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고란사의 저녁 예불 소리는 백마강의 추억어린 노랫소리처럼 잔물결의 파동을 일으키면서 마치 마지막 백제인의 슬픈 아우성처럼 그 소리가 너무도 구슬프다.


이곳에서 10년간 황포돛배로 사람을 실어 나르고 있는 선장님은 백제의 마지막 역사, 소정방의 나당연합군을 피해 백제의 3,000 궁녀가 백마강으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이라고, 설명했지만 사실은 다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나당연합군에 밀린 의자왕이 아래 백마강 강물을 닿고 말았다.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치 못할 줄 알고 차라리 자살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하여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항복한 후, 당에 압송된 후 병사(病死)하였고, 3,000 궁녀도 부여성이 함락된 후 당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치던 아녀자들이었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쨌든 바위에는 낙화암(落花岩)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바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 고란사 종


고란정의 물맛은 전국적으로 정평이 날 정도다. 부소산 중턱부터 깊게 흘러들어 정화된 물길을 잡아두어 우물에 넣어두니 그 물 맛이 백제의 쓰린 간장처럼 약간 떫은 듯, 하지만 뒷맛은 개운하다.


예전에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던 고란사의 뱃전에는 아직도 그 시절의 영화처럼 건너편의 은산면 일대가 굽은 듯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형극이다. 유람선으로 그 나루터의 형태가 세월의 흔적처럼 변했지만 아직도 고란사를 오르기에는 뱃편이 훨씬 유용하다.


은산면에서 바라보는 부소산은 천연 요새의 절벽이다. 아무래도 도성을 지키기에는 이 낙화벽의, 부소산의 서쪽 절벽이 천연적으로 잘 갖추어진 방어벽이 분명했으리라. 하지만 전설은 이 벽에서 수많은 백제의 마지막을 고하게 되었으니 아이러니다.


백제인의 수많은 영광을 뒤로하여 백마강은 아직도 그 강폭을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 그 시대의 영욕을 떠나 역사의 증언으로 흐름을 멈추지 않을 터이다. 배호가 불렀던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에도 푸른 물줄기의 그 끝을 모르는 채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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