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취재] 광화문의 기둥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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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취재] 광화문의 기둥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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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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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취재) 광화문의 기둥을 세우다!


2009년 8월 3일 광화문의 주 기둥이 희망의 미래를 향해 다시금 제 자리에 바로 세워졌다. 근 60여년만에 광화문은 그 위용에 걸맞는 기둥을 갖게 된 것이다. 1968년 세워졌던 콘크리트 기둥을 완전 해체하고, 신응수 대목장의 지휘하에 전통 기법으로 다시금 역사를 세워낸 것이다.



광화문은 1968년 콘크리트로 복원되기 이전에는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궐(三闕)의 홍예(虹朗)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였다. 두공(枓?)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으로 마감을 한 전형적인 우리 목조건축물의 완형이었었다.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던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었다. 1395년(태조 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 7)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북쪽에 이전시켰으나 그 마저도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철 구조물 속에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광화문의 원형찾기, 신응수 대목장은 이제 역사를 다시 쓴다는 각오로 광화문 복원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목 부재 하나를 다듬는데도 직접 자신의 손으로 몇 차례에 걸친 확인을 통한다고 한다. 신응수 대목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궁궐건축의 전문가이다. 그의 손에 의해 하나 둘 제 모습을 찾아간 목조 건축물이 이 시대의 ‘목수’라는 이름의 대명사가 된 곳이 한 둘이 아니다. 시대를 빛낸 아름다운 장인의 손에 의해 복원되는 광화문은 시민들 품으로 돌아간 육조거리 앞에 제 모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공사가 완료되는 내년 12월 무렵에는 조선 궁궐 건축의 백미를 맞보게 될 것이다. 아직도 광화문 곳곳에는 석축 공사가 한창이고, 엄격하게 출입이 제한된 공사 현장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여름 한 날의 뜨거운 열기를 더한 열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1층 누각의 원형에 기준 하는 둘림은 그 모양이 무척이나 단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를 에둘러 점차 누각의 높이에 맞춘 다포가 자리 잡아 가고 한충 한층 그 높이를 더 할 때마다 광화문은 점차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궁궐의 담장(궁장) 공사가 한창인 뜰 안으로는 원형 복원 후 궁장의 높이와 광화문 앞 도로의 높이가 서로 상충할 수도 있다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배수처리 문제라든지, 도로와 궁장의 부조화한 문제 등을 검토 되어야 한다.


진강건설 최근원 소장은 "원형 복원이 최우선"이라며, "궁장 복원후에 원래의 지역 높이보다 현재의 도로가 높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점이 향후 검토되어야 한다. 감리단을 맡고 있는 이용철 단장 역시 “고증 절차를 철저히 따르겠다”고 원형 찾기가 최우선임을 강조하였다.



광화문의 원형 찾기 사업, 그것은 일제와 6,25사변으로 원형의 뒤틀림, 그 역사를 다시 찾는 계기가 될 것이며, 불화의 시대를 아우르는 광화문 광장 육조거리 복원과 더불어 국민들에게 문화재 보전과, 화합의 기회를 알리는 소중한 공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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