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건축의 전설 조원재 도편수의 계보는?
상태바
궁궐건축의 전설 조원재 도편수의 계보는?
  • 관리자
  • 승인 2009.09.0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정대기 목수



정대기 목수는 여주에서 3형제 중 2남으로 태어나 해방 전 소학교를 졸업했다. 신성 중학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상 중학을 마치질 못했다. 그러다 같은 동네 형의 친구였던 이익현 목수를 만나게 된다. 형의 친구이자 스승 이익현으로부터 목수로서 재능을 인정받은 정대기 목수는 나이 스무 살에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집을 짓게 된다. 바로 신성 중학교 교장의 개인 주택이었다.



조선 궁궐건축의 최고봉이었던 조원재 도편수와의 인연은 바로 같은 동네에 살았던 이광규 목수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62년 숭례문 복원 당시 도편수는 조원재, 부편수는 이광규였다. 이광규 목수가 처가인 이천 부발에 들렀을 때 인근 여주에 목수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정대기 목수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광규 목수는 당시 서울 청량사 신축공사 중이었고, 조원재 도편수의 수제자였다. 여주의 정대기 목수를 서울로 불러들인 이광규 목수는 정대기 목수의 평생의 스승 조원재 도편수를 소개한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조원재 선생의 차남인 조상철 씨는 “안암동 골방에서 아, 열심히 일했어. 특히 정대기 목수는 도면 같은데 이광규 목수보다는 훨씬 밝았어. 이광규 씨는 일만했어. 정대기 목수는 아버지 옆에 붙어 서서 도면도 그리고...”. 그러다 잠시 말을 끊고는 “끝까지 우리 아버지(조원재)를 모신 분은 정대기 씨야. 이광규 씨는 기술이 웬만해서 스스로 일을 찾아 나섰지.” 하면서 조원재 선생의 적자로서 정대기 목수를 기억해냈다. “아버지는 1972년 겨울에 돌아가셨어. 그런데 그 많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안 찾아 오더만. 그런데 정대기 씨만은 끝까지 남아서 화장장까지 따라다녔지. 이광규 씨도 있었고, 그 당시는 목수일 하는 사람들이 힘들었거든. 지금처럼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지금이야 세월 좋아졌지.”







▲ 조원재 도편수의 차남 조상철 씨



조원재, 그는 조선 최고 궁궐 목수의 계보를 이어온 진정한 목수이자 전설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조태흥으로 1903년생이다. 태어난 곳은 안암동, 그리고 채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조선 궁궐 목수의 정통 계보를 잇는 목수 최원식이였다. 조원재 선생은 갖은 고생 끝에 최원식의 수제자로 들어갔고, 금강산 장안사를 비롯하여 조선의 궁궐은 모조리 그의 손을 거쳐 복원되고 수리되었다. 그의 큰 아들 역시 목수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조상균이다. 하지만 둘째 아들인 조상철 씨는 너무 고단하고 힘든 목수의 삶을 지켜봐왔던 탓에 법대에 진학하여 아버지와 형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아버지 성격이 대단했어. 조금도 불의한 모습을 보지 않았어. 한번은 자신이 키운, 아마 서울대 다녔던 최영환인가 하는 분이 문화재 관리국 직원이 되어 감독관으로 왔는데, 소위 말해서 무언가를 바랐던 모양이야. 문화재관리국을 발칵 뒤집어 놨지. 그 일로 그 친구가 목이 잘렸지, 관리국에서.”



그렇다면 아버지의 제자였던 정대기 목수에 관한 기억은 어땠을까.



“우리 아버지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지. 우리 정대기 씨는 타고난 성품상 아버지 비위를 잘 맞추었지. 한시도 그 옆을 떠나지 않았어. 숱한 제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정대기 씨를 가장 눈여겨봤지. 그런데 새까만 어린 후배가 대목장이 되었으니... 허허... 텔레비전 같은데서 보니 대단하더구먼... 허허... 그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지. 우리나라가 그렇잖아.”







▲ 조상철 씨(좌)와 정대기 목수(우)




그는 1962년 숭례문 복원에 실질적인 목수일은 모조리 정대기 목수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말을 덧붙였다. “정대기 씨가 모든 일을 주관하셨어.” 이는 정대기 목수가 숭례문 복원공사 현장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조태섭, 백운기, 지금 한창 뜨고 있는 신응수 이런 친구들은 겨우 심부름 하는 정도였지.” 이러한 증언은 숭례문 복원 당시 정대기 씨와 함께 참여한 김명성 목수의 처남으로 현재 월정사 근처 오대산에 사는 조태섭 씨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숭례문 복원이 끝난 후 1966년 김명성 목수는 월정사 대웅전 공사 도편수로 옮겨갔다. 이때 김명성 목수는 이광규 목수와 함께 석굴암 전실공사를 하고 있던 정대기 목수를 불러들여 부편수로 임명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월정사 대웅전 공사가 가지는 의미는 대단하다. 사실 충청도에서 활동하던 김덕희, 김중희 등 전국에 쟁쟁한 목수들이 다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월정사가 당시에 일이 없던 전국 목수 집합소였다고 조태섭 씨는 증언한다.



또한 1962년 숭례문 복원 당시, 조원재 선생이 도편수, 이광규 목수가 부편수로 현장을 지시하는 위치였다면, 정대기 씨는 현장의 실질적인 목수로서 조원재 선생의 가장 충실한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마장동 마장목재소에서 치목한 목재로 만든 남한산성 팔각정 신축, 파고다 공원 삼일문 등 조원재 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숱한 목조건축물을 복원한 정대기 목수, 그야 말로 영광을 뒤로하고 묵묵하게 스승의 뜻을 따르는 진정한 목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