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보물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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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보물 되다
  • 이경일
  • 승인 2021.12.2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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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건축 8건 ‘보물’ 신규 지정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대구광역 유형문화재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8건의 관아(官衙)건축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하였다.

 

이번에 지정되는 관아 문화재는 서울 1, 대구 1, 경기도 3, 강원도 2, 경남도 1이며, 행정체제상으로는 중앙 관아가 1, 지방 관아로 감영과 동헌 3, 객사 2건이며, 남한산성의 병영 관아 2건이다. 참고로,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관아건축은 총 5건으로, 모두 객사 건물이다.

 

관아건축이란 왕조시대 관원들이 모여 나랏일을 다스리기 위해 지은 건축물로, 중앙집중의 행정체제가 마련된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도시에는 동헌을 중심으로 관아건축이 전국적으로 건립되어 그 수효가 상당하였지만,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도시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관아건축은 수차례의 전쟁으로 파괴되었고, 근대도시로의 변화과정에서는 급격히 소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존하는 관아의 대부분은 지방에 있고,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학교 등으로 전용되면서 상당 부분 변형되어 용되었고 특히, 한성부(漢城府)에 있던 관아들은 현재 3개동만 남은 상황이. 이렇게 남아있는 관아건축이 적다보니 그동안 다른 건축유형에 비해 연구와 관심이 일부 소홀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관아건축은 본래 관원이 나랏일을 보는 곳인 만큼 궁궐건축이나, 사찰건축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으나, 비교적 높은 기단과 익공식 공포, 팔작지붕 등을 사용하여 일반민가와 달리 단아하면서도 위엄 있게 지어졌다.

 

이번 관아건축 문화재의 보물 지정은 ▲ 조선 시대 중앙관아 건물 중 원위치에 보존되고 있는 종친부 건물이 지정되어 조선 후기 중앙 관아건축물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 ▲ 지방관아 중 관찰사가 파견되어 근무하던 감영(監營)정당(正堂)인 선화당과 읍치에 파견된 지방관의 집무 공관인 동헌(東軒) 처음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 ▲ 전란(戰亂) 속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후대에까지 교훈의 공간으로서 역할 했던 남한산성 내의 병영 관아건물이 지정되었다는 점 등이 눈여겨 볼만하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은 조선 시대 관공서 중 최고 등급인 정1품아문의 하나인 종친부(宗親府) 건물로, 관아건축이면서 궁궐건축의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종친부의 권한과 조직을 확대하면서 종친부 건물이 대규모로 늘어날 당시 중건(1866)되었다. 당시 경근당(敬近堂)은 대군, 왕자군 등 종친들의 대청으로 종친부의 중심 건물로서, 좌우로 각각 옥첩당(玉牒堂) 이승당(貳丞堂)을 두고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이승당은 1950년대 이후 사라졌다.

 

경근당은 정면 7, 옆면 4칸으로 된 이익공 공포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정면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옥첩당은 정면 5, 옆면 3칸으로 된 초익공의 팔작지붕으로, 건축물의 규모나 공포의 형식 모두 경근당 보다 격을 낮추어 위계를 두었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사진=문화재청)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사진=문화재청)

 

경근당과 옥첩당은 고종대 302칸에 달했던 종친부 건축군의 중심 전각으로서 19세기 중앙 관아 건축의 배치와 구성, 연결방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사례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1981년 경근당과 옥첩당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가 2013년 다시 원위치로 이전되었지만, 당초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며 많은 부재를 재사용했다는 점이 건축물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중 최상위 관직자였던 종2품 관찰사가 파견된 감영(監營) 중 경상도 감영의 정당(正堂)으로, 1807년에 중건된 이후 몇 차례의 수리를 거치면서 다소 규모의 변화가 보이나 대체로 건립 당시의 축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2고주 7량가의 붕가구를 이루고 있고, 지붕마루의 양성 마감과 용마루에 취두를 갖춘 팔작지붕 등은 조선후기 관아건축으로서 위계와 높은 품격의 건축적 특성을 갖고 있다.

조선 시대 팔도와 읍치에 설치되었던 수많은 관청 건물 가운데서 현존하는 드문 사례로서 조선 후기에 다시 시작된 강우 측정 기구인 측우대, 깃대를 꽂았던 깃대꽂이 등도 남아 있어 감영의 공간구성과 운영시설을 살필 수 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의 청량산 정상에 성의 안팎을 모두 굽어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에 위치하며, 남한산성의 축조 때부터 성내를 지휘하는 장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1751(영조 27) 중층의 장대를 건축하고, 안에는 무망루, 밖에는 서장대라 편액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836(헌종 1) 개건된 것이며, 이 때 지금의 수어장대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하층은 정면 5, 옆면 4, 상층은 정면 3, 옆면 2칸 규모의 중층 건물로, 하층 내 공간의 기둥 내부는 장마루를 깔고 판벽과 평난간으로 구획한 공간으로 꾸미고, 그 둘레의 퇴칸부는 네모난 벽돌(방전)을 깐 바닥공간으로 하여 두 영역을 나누었으며, 상층의 실내 공간은 전체에 장마루를 깔고 사방으로 널판문을 달았다. 이와 같이 중심부와 주변부를 정확히 구분하여 구조와 실내공간을 이에 맞춘 것은 기능을 우선하는 군사 건축적 성격을 보여준다.

 

또한, 이 장소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물론이고, 이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등 역대의 국왕이 남한산성을 찾을 때 반드시 올라서 옛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던 곳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남한산성 수어장대(사진=문화재청)
남한산성 수어장대(사진=문화재청)

 

「남한산성 연무관」은 남한산성을 수축(修築)하던 시기인 1625(인조 3)되어, 그 직후 1626년에 창설된 중앙 군영인 수어청의 중심 건물로, 1795(정조 19) 수어청의 본영이자 광주유수의 집무처로 사용되었다. 창건 이래 세 번에 걸친 중수의 기록을 상량묵서와 상량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편액에 있는 연기(年紀)1762(영조 38)의 것이다.

 

연병장을 바라보는 높은 위치에 건립한 연무관은 정면 5, 옆면 4칸으로 정면과 배면에 퇴칸을 두고 있으며. 중앙부에서 기둥을 뒷면으로 이주하고 벽을 세워 국왕이나 수어사가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건립기록이 확실하고, 타 지역에 남아있는 사례가 드물면서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정조의 남한산성 행차 당시 사용되어 정조의 애민정신이 깃든 장소로서 그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안성 객사 정청」은 안성 객사 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많은 축소와 변형을 겪은 동‧서 익헌 건물을 제외한 정청(正廳)보물로 지정된다. 안성 객사는 1363(공민왕 12) 이전에 건립된 이후 조선 후기에 지붕기와를 바꾸었고, 근대기인 1931, 19952차에 걸쳐 이건하여 원위치가 아닌 단점이 있다. 그러나 정청의 공포 형태와 구성은 수덕사 대웅전과 유사하면서도 살미와 살미 사이에 장식재와 같은 동그란 부재를 깎아 놓은 특징이 있다. 공포에 이런 모습이 남겨진 건물은 안성 객사 정청이 유일하다. 또한, 대들보와 종보는 고려후기 건축물의 전형적 특징인 항아리형 보를 사용하고 있으며 고려 시대 건립되어 현존하는 객사 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강릉 칠사당」은 강릉대도호부 관아 구역 내에 있으며, 조선 시대 지방 수령의 집무처로 사용되어 온 건물로, 칠사당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수령의 주요 업무가 칠사(七事)로 규정되었던 데서 연유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칠사란 농사, 호구, 교육, 병무, 세금, 재판, 풍속을 말한다. 최초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632(인조 10)에 중건하고, 이후 1867(고종 4)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

 

정면 7칸 측면 4칸의 5량가 건물로, 실 배치는 중앙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왼쪽은 온돌방 1칸과 마루방 2, 누마루 2, 그리고 대청에서 누마루로 올라갈 수 있도록 툇마루 앞으로 대청마루보다 높은 작은 툇마루를 덧달았다. 중수‧중건 시기, 시대적 배경, 역사적 인물과 사건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점, 관아건물로 대청마루 다양한 마루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공간의 변화와 위계를 구분하고 있는 평면 형태와 구성, 바닷가에 위치한 지역적 특성을 나타내는 물고기 모양 화반과 삼익공의 공포 형식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남아있는 지방의 동헌 건물 중 매우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은 조선 시대 강원도 감영의 정당(正堂)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공간이다. 특히, 강원감영 선화당은 정문인 포정문도 원형으로 남아있어 조선 시대 감영의 구성 중 핵심적인 공간인 진입공간의 위계를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감영이다. 기록상 1665~1667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는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은 정면 7칸 옆면 4칸의 평면에, 가구는 2고주 7량가이며, 팔작지붕 겹처마에 양성을 하였으며, 용마루에 용두,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망와를 설치하였다.

 

원주 선화당은 조선후기 남부 6도 감영의 선화당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하고, 중수와 개건, 도시적 변화가 있었음에도 같은 자리에 실물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1875년 개건 당시의 건축적 양상을 보여주는 포작과 주삼포라는 구체적인 명칭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기록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1667년 중건된 이후 현재까지 주요 목조가구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조선 시대 고급 관아건축의 전형으로 감영 정당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사례라 하겠다.

 

「거제 기성관」은 거제현과 거제도호부의 객관으로서 1665(현종 6) 창건 이래, 1726(영조 2), 1801(순조 1), 1892(고종 29)의 중수를 거쳐 1909년경까지 기능을 유지하였다. 1974년의 해체수리 시에 종도리 아래에서 창건 시의 상량묵서와 함께, 3건의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이 상량묵서와 상량문은 승장(僧匠)들이 등장하는 점 등 조선 후기 지방 관아 건축의 건립 상황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 풍부한 회화식 지도와 사진 등의 자료가 남아 있어 기성관의 전체적인 원형을 추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건물은 정면 9, 측면 3칸의 직사각형 평면을 갖는 단층 팔작집인데, 정청에 해당하는 중앙의 3칸은 그 전면의 지붕을 양익헌 부분보다 한단 높게 만들어 앞에서 았을 때 솟을지붕을 가진 것처럼 꾸민 점이 특별하다. 뒷면의 지붕은 전체가 같은 지붕면으로 되어 있는데 이와 같이 전후면의 지붕면을 다르게 구성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

 

행정과 군사적 성격을 갖는 남해안 관아의 객사로서 인근의 통영 세병관, 여수 진남관 등과 비견할 수 있는 규모와 형식을 고려할 때, 보물로 지정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은 2018년부터 건조물 문화재에 대한 지정가치 조사를 통하여 2019누정(樓亭) 문화재 10, 2020년에 서원‧향교 20건을 보물로 지정한 바 있으, 지난해부터는 120여 건의 관아건축들 전문가 사전 검토를 거쳐 선정한 11건을 대상으로 지정 조사해 최종적으로 이번에 8건의 관아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하게 됐다.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건조물 문화재 주제연구를 통하여 가치가 알려져 있지 않은 건조물 문화재를 적극 발굴하여 국민들에게 알리고 활용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등 지역 문화재의 사회적 가치 제고와 주변 환경 정비 등 역사문화환경을 개선하는 사업도 관심을 가지고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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