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에 묻힌 ‘비운(悲運)의 왕’
고종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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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에 묻힌 ‘비운(悲運)의 왕’
고종을 찾다
  • 관리자
  • 승인 2005.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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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대교를 건너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읍
서문삼거리를 지나면 국화리 청소년 야영장이 있다.
야영장 입구를 지나 차량통제구역 표지판이 서있는
곳에서부터 15분 정도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산세에 묻힌 단촐한 능이 하나 나오는 데 장식이라고는
최근에 놓은 듯한 상석 외에 어른 허리께에 닿을 듯
아담한 체구의 석인(石人) 두 쌍이 전부다. 이 곳이 바로
‘비운의 왕’ 고려 제23대 왕인 고종의 묘다.







 












▶홍릉을 알리는 유일한 표지판

 

강종과 원덕태후 유씨의 맏아들로 태어난 고종은 1213년에 즉위하여 46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권을 쥐지 못한 허수아비 왕이었다. 즉위 당시 무신세력의 핵심이었던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219년(고종6)에 그가 죽자 아들인 최이(우)가, 또 그 뒤를 이어 자손인 최항과 최의가 권력을 계승함으로써 고종은 오래도록 권좌에서 밀려나 있었다.

 







 






1258년(고종45)에 유경, 김준 등이 나서 최씨정권의 마지막 실력자인 최의를 죽여 겉으로는 국왕이 정권을 잡는 듯 보였으나 실세는 여전히 무인들이었다.







 







 




▶왕릉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단촐한
고종의 묘. 두 쌍의 석인만이 외로운 군주를
호의하고 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는 거란과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어 1231년(고종18)에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몽고군과 대항하였다. 강화 천도를 기점으로 몽고와의 28년에 걸친 전투를 벌인 결과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이 때 경주 황룡사 구층탑을 비롯하여 대구 부인사의 대장경판이 불타는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파괴되고 침탈당했다.
 


 




고종은 부처의 도움으로 난국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오늘날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한 고려대장경을 1236년(고종24)부터 1251(고종38)에 걸쳐 발간하기도 했지만, 귀족들의 문란한 생활과 문신들을 중심으로 몽고에 대한 강화 여론이 형성되면서 결국 1259년(고종46)에 태자 저(후일의 원종)가 몽고로 가서 강화의 뜻을 전한다, 항쟁을 단념한다는 표시로 강화의 성곽을 헐어버린 이후 몽고는 노골적으로 고려의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마침내 1270년(원종11)에 무인정권이 몰락하면서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렸지만 몽고에 강화의 뜻을 전한 그 해, 고종은 강화에서 사망하였다. 국화리의 홍릉은 1259년 6월 왕이 죽은 후, 3개월 뒤에 축조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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