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장인]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9호 목조각장 한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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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장인]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9호 목조각장 한봉석
  • 관리자
  • 승인 2010.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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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석 장인은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스님이 도를 닦는 것과 똑같다고 이야기 한다. 스님들이 부처가 되려고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듯이 조각도 하나씩 하나씩 벗겨가면서 하나의 본체를 찾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을 계속 없애는 작업이라고 한다.


경기도 남양주의 한봉석 장인 작업실은 3월에도 한겨울처럼 추웠다. 조그만 난로만이 작업장에 온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상의 표정을 조각하는 한봉석 장인의 조각도는 도를 닦는듯 무념과 무상의 버림을 하고 있었다. 먼저 올 3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축하하는 기자에게 그는 "이제부터 중요한 일의 시작이다"며, 앞으로 전통문화를 알리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 임무를 맡게되어 어깨가 무거워진다고 머쓱히 웃었다.

한봉석 장인은 초등학교 졸업 후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허길량 선생님의 제자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40여년을 불교 목조각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봉석 장인과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오면서 어려웠던 이야기, 스승인 허길량 선생님과의 인연들, 전통 불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그가 꿈꾸는 전통 장인으로서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9호 목조각장 한봉석


처음 목조각을 배우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 처음 1년은 선배들 뒷바라지를 했죠. 아침에 일어나서 준비, 사포질... 선배들이 그림 그려주면 먹칠이라고 복사를 해서 파냈죠. 밑에 후배들 들어올 때까지 1년을 그렇게 했지. 그런데 그때 사포질하고 한 게 지금 도움이 되는 게 눈을 감아도 감각이 있어요. 그런 걸 하다보면 그런 흐름이 손에 감각이 생기는 거에요. 그림을 배운 것도 아닌데 초같은 걸 다 그려낸단 말이에요. 내가 이 자리에 온 것도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해서에요. 그때는 앞에 선배를 잡아야 월급이 올랐어요. 기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고... 무조건 앞의 선배를 내가 잡는다는 생각으로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주변의 선배들도 이제는 너는 될 줄 알았다는 식으로 좋게 얘기를 해주죠.






▲ 경기도 무형문화재 목조각장 제49호 한봉석


허길량 선생님은 스승으로서 어떤 분인가요?


- 허길량 선생님은 스승으로서 뚜렷하게 뭘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그런 분은 아니에요. 내 성격도 그렇고... 선생님은 저를 강인하게 키웠어요. 자상한 사람은 아니죠. 전 독립을 하고 선생님께 손 한번 벌린 적이 없어요. 일 좀 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하청을 줬겠지 생각하지만 절대 그런 적이 없어요. 한 번은 하도 힘들어서 그 때 전시는 늘 하니까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데 왜 나한테는 요만한 도움 하나 안주냐고. 난 조금만 도움 줘도 클 수 있을 텐데... 그랬더니 선생님이 내가 그만큼을 도와주면 넌 약해진다는 거에요. 선생님한테 기댄다는 거지. 그때는 그게 사실 기분이 안 좋았죠. 서운하고... 그래서 이를 악물고 좋다, 내가 해보마. 이를 악물고 활동을 하게 되었죠. 그 뒤에 대학 입학할 때 선생님한테 처음 손을 벌렸어. 등록금 좀 대주시오, 그랬더니 첫 입학금을 대주시더라고요.


40여년을 목조각을 하셨는데 목조각이란 어떤 작업인가요?


- 이제야 이게 조각이구나 하는 것을 알 것 같아요. 부처님 조성을 어떻게 하느냐... 근데 요즘 공부하면서 하면서도 여태껏 잘 몰랐던 것을 학문적으로 배우면서 느끼는 게 조각을 어떻게 한다는 것 보다는 조각이란 무엇이냐 이렇게 얘기가 되더라고요. 조각을 깎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각이라는 게 스님들 도를 닦는 거나 똑같아요. 스님들이 부처가 되려고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시잖아요. 그게 나를, 자아를 찾아가는 거란 말이야요. 이게 뭔가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벗겨가면서 본체를 찾는 거야요. 그런데 조각도 마찬가지더라고요. 통나무가 됐든, 통판이 됐든 하나의 본체를 찾기 위해서 불필요한 것을 계속 없애는 작업이에요. 그러면 나중에는 본체가 나오게 되죠. 본체가 나올 때까지 계속 없애는 작업이에요. 조각은 붙이는 작업이 아니란 말이죠. 조각이 그거더라고, 아 이거구나 이걸 깨달은 거에요.




▲ 한봉석 장인의 작품


허길량 선생님 문하에서 목조각을 하실 때 이야기를 해주시죠.


- 선배가 하나 있었는데 나가면서 내가 책임자로 되었죠. 그때 한 20명 정도 됐는데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많았죠. 그때는 많이 힘들었어요. 뒷일 봐주면서 일을 해 나가는데... 선생님이 믿어주는 게 고마운 거죠. 선생님은 월급도 나한테 던져주고 나가요. 그러면 내가 다 처리하고... 선생님도 술, 담배를 안 해요. 나도 안 하고... 선생님한테 배운 건 선생님의 부지런 한 걸 배운 거죠. 선생님은 항시 누구보다 아침 일찍 작업장에 나와요. 아주 미치는 거죠. 늦게 나오면 좋겠는데... 그 틈에서도 저녁에 내가 검정고시 하게끔 시간을 내주셨어요. 그때 공부를 하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했죠. 선생님께서 항시 하신 말씀이 네가 뭐한다고 허점을 보이면 애들이 책임자라고 맘대로 하네 이러니까 모든 것을 정확하게 하라고 했죠. 선생님께서 책임감을 엄청나게 심어준 게 지금도 나는 약속하면 10분 전에 항시 먼저 가는 그런 사고가 돼버린 거죠.


선생님한테서 독립할 때는 별 말씀 없으셨나요?


- 93년도에 독립을 했는데, 독립 한다고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두 달을 안 들어왔어요. 와서 돈만 던져주고 두 달을 안 들어와요. 왜냐하면 생각을 해봐요. 이십 년 간 내가 그림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다 했으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선생님께서 독립 시켜준다고 했는데 타이밍이 안 맞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그냥 아무것도 없이 무릅쓰고 나와 버렸어요. 독립을 해서 선생님 옆에 좀 떨어진데서 시작했는데... 내가 나오면서 그래도 오랜 정이라든가. 모체가 잘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내가 나오면서 도안쪽, 조각쪽, 책임자쪽 선배를 3명인가를 넣어놓고 나와 버렸죠. 선생님은 내가 많이 길어야 2년이고, 1~2년 후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난 안에서 일만 했던 사람이라 아는 게 없었으니까.



▲ 한봉석 장인이 작업 중인 불상

어렵게 독립하고 많이 힘드셨겠네요.


- 엄청나게 힘들었죠. 아무것도 없이 월급쟁이만 하다가 나와서 진짜 요만한 축사 빌려다가 시작을 했는데 그때 문화재 등록 88년도에 냈기 때문에 늘 전시가 있단 말이에요. 전시작품을 해가지고 처음으로 내 작품을 전시 했어요. 다른 때는 일하면서 하니까 내 맘대로 작품이 안 나오는데, 그렇게 전시하면서 팸플렛이 움직이게 되니까, 그것을 보고 스님과 인연이 되가지고 일이 하나하나 생겼죠. 난 일이 많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처럼 다작을 못해요. 일복은 있는데 돈복은 없죠.


작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론 어떠세요?


- 경제적으로는 많이 힘들어요. 물론 80년대에는 조각이 붐이었어. 그런데 93년도 내가 독립하고 나서 IMF시작 됐잖아요. 그때 많이 힘들었는죠. 그때는 일이 하나 있으면 일하는 거에요... 한두 명 데리고 월급주고 나 먹고 살고.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일을 한다고 해서 선배들처럼 내가 돈을 못 벌었어요. 그때 내가 이렇게 판단을 한 거죠. 아, 이럴 때는 내가 번돈의 1/3을 내 공부하는 데 투자하자 하고... 그것이 나중에 내 경쟁력이 되어 내가 이길 것이다 한 것이 지금까지 온 거죠.


장인으로 배움에 뜻을 갖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 쉽지 않았죠. 난 길게 보고 돈 버는 걸 포기하는 거예요. 지금도 집 담보 받아서 다니고, 학자금 대출해서 다니고, 장학금도 받고... 이렇게 지금 딸 둘하고 나하고 셋이 대학에 다녀요.




▲ 한봉석 장인의 작품


우리나라 불상과 중국이나 일본 불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 많이 다르죠. 문화차이에서 사고가 다르니까 많이 다르죠. 중국을 보면 정말 광대해요. 어마어마해요. 스케일이 진짜 크죠. 표정도 그네들은 표정이 옛날에 양귀비 오동통하잖아요. 불상도 그런 스타일이에요. 일본가면 아주 샤프해요. 아주 정확하고....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의 목불이 제일 많이 남아있어요. 내가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게 조선시대가 숭유억불시대라 불교가 탄압받고 해서 불상이 없을 것이다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임란이든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 승병들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나라에서 엄청나게 불교를 밀어가지고 불교유물을 재건했단 말이에요. 그때 엄청나게 불상이 많이 발전이 되었어요.




▲ 한봉석 장인의 작품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것은 어떤 것인가요?


- 장인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을 바래요. 다른 사람들은 나는 일이 늘 있는 줄 알아요. 나는 일이 없으면 그 시간에 작품을 하거든요. 그래서 잘나간다고 얘기 듣죠. 나는 못나간다고 안 하고 잘나간다고 하니까 고맙지요.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저 양반한테는 기대치가 있구나 생각한단 말이죠. 앞으로 강단에 설 수 있으면 좋겠고, 또 문화 사업을 통해 주변에 불교미술 하는 사람들의 활동 범위를 넓혀 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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