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특집」외규장각의 흔적을 찾다. - Part3.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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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특집」외규장각의 흔적을 찾다. - Part3. 프랑스
  • 관리자
  • 승인 2010.1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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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규장각


조선왕조는 전란에 대비하여 국서(國書)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일에 매우 고심하였다. 그래서 춘추관, 성주, 전주 등지에 사고(史庫)를 마련하여 실록 등을 분산해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전주사고와 강화사고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선조는 강화도가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전주사고의 책들을 모두 강화도로 옮겼다. 그 시기가 선조 28년(1595)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유재란(1597)이 일어났고, 선조는 책들을 모두 영변 보현사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선조 36년 (1603) 강화도로 다시 자리를 옮긴 책들은 병자호란(1636)으로 인하여 일부 수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책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왕의 정책에 따라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삶을 아스라이 연명하다 문화정치를 추구하던 정조가 통어영(경기, 충청, 황해 삼도의 수군을 통제하던 군영)을 강화로 옮겨 군사의 요충지로 만들면서 사고의 안전성이 더 보장된다는 이유로 강화읍성 내 행궁 자리에 외규장각을 설치, 그 안에 지금까지 분산되어 있던 모든 중요 서적들과 왕실 족보, 어필, 어제, 옥인, 금보 등을 비롯해 서울 궁성에 있는 다수의 의궤와 옥책(옥돌에 새긴 책) 등 특별한 가치와 중요성을 띄는 것들을 모두 옮겨 보관하게 하였다. 당연히 외규장각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던 창덕궁 금원 북쪽에 위치한 규장각(외규장각과 구분하기위해 내규장각이라 불리움)의 중요 서적과 기록들도 외규장각으로 옮겨졌다.






▲ 병인양요


서적들은 그렇게 약 85년간을 평안히 외규장각에서 지낸듯하다. 하지만 문제는 고종3년(1866)에 시작된 프랑스인 선교사들 박해가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이어져 선교사들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자, 겨우 지방으로 몸을 숨겨 한국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중국의 톈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이전부터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고 있던 프랑스는 이 사건을 빌미삼아 조선 문호를 개방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조선은 프랑스에 쉽게 물러나지 않았고, 프랑스는 무력으로 조선을 위협했다. 그러나 중국을 통해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던 조선은 천주교를 탄압을 더 강화하고, 프랑스 군인들의 침공을 막기 위한 강화도, 한강 유역의 수비를 강화해 프랑스 군을 멋지게 물리쳤다. 이것이 우리의 외규장각이 위협을 당한 가장 큰 사건 “병인양요(1866)”다.






▲ 외규장각 도서 관련 프랑스 광고


그러나 재밌는 것은 이미 당시의 로즈 사령관은 이미 그들이 폐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인지 처음 강화를 침공하였을 때부터 강화 읍내의 각 관아를 수색하여 마치 보험처럼 문화재 탈취 작전을 명했다고 한다. 그렇게 약탈해 간 것이 총 345권. 나머지는 외규장각과 함께 모두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 잿더미로 돌아왔다. 당시 조선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쁨에 외규장각 도서 일부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모르고 지내오다 1975년 어느 날, 파리국립도서관에서 일을 하던 박병선 박사가 조선시대 어람용 의궤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목록을 정리하여 세상에 알림으로써 외규장각은 약 100여년 만에 우리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국가는 프랑스 정부에게 외규장각 반환소송을 했고, 프랑스 정부는 1993년 한프 정상회담에서 외규장각 도서 중 일부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김영삼 정상에게 전달하며 프랑스 고속철 알스톰사 TGV(이하 테제베)를 도입하면 외규장각 도서를 모두 반환하겠다 약속한다. 당연히 우리 정부는 다른 나라의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외규장각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의 고속철 테제베를 철로가 놓이기도 전에 들여 놓는다. 하지만, 외규장각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품에 돌아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외규장각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자로서 할 말은 없다. 그저 현재도 외규장각으로 인하여 프랑스와 우리나라 간의 싸움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 싸움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써 부디 우리의 것들이 우리 품으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그러기위해선 국민인 나도, 국가의 대표인 정부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숙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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