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충남지역 국가지정 문화재 보유사찰 답사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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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충남지역 국가지정 문화재 보유사찰 답사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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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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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마곡사 일정을 마치고 두 번째로 찾은 사찰은 부여군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있는 오래된 사찰, 무량사였다.

무량사는 마곡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 세워진 사찰이나 대부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전각들은 그 이후 조선시대 때 중건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무량사 경내에는 극락전(極樂殿;보물 제356호), 오층석탑(五層石塔;보물 제185호), 석등(石燈;보물 제233호)을 포함한 보물 6점과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7점 등 총 13점의 지정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무량사의 극락전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많은 사찰들의 전각들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하지만, 주불전인 극락전을 제외하고는 불전의 규모가 크지 않은데, 소박하면서도 엄숙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풍긴다.






▲ 사진 1. 극락전



무량사 극락전은 외부에서 보면 2층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내부는 통층 구조의 조선 중기 건물로서, 마곡사 대웅보전과 함께 당시 목조 건축 기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내부에는 거대한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는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塑造佛)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한다. 불상의 복장 유물에서 발원물이 나와 이 불상이 1933년에 흙으로 빚은 아미타불임이 분명히 밝혀져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예가 되었다.

또 극락전 안에는 1627년에 그린 보물 제1265호 무량사미륵불괘불탱(無量寺彌勒佛掛佛幀) 이 보관되어 있는데, 연대와 함께 괘불을 그린 스님들의 이름도 적혀 있어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 사진 2. (좌)휘어진 활주 (우)좌·우 벽체






▲ 사진 3. (상)박락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 (하)흙먼지가 내려앉은 불상



극락전의 추녀를 받치고 있는 기둥인 활주가 약간 휘어져 있는 상태이고, 내부 벽체의 박락으로 극락전 내부와 불상에 흙먼지가 그대로 떨어져 영향을 주고 있다.






▲ 사진 4. 오층석탑



무량사오층석탑은 무량사의 주불전인 극락전 정면에 위치하고 있다. 약간 낮은 듯 보이는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오층의 사각석탑이다. 기단이 넓어 그 위에 7.5m의 높이로 높게 올린 탑이지만 안정감을 주며 적당한 체감으로 상승감도 갖추고 있다.

너비는 넓고 기울기는 거의 평평해 보이는 완만한 옥개석(屋蓋石)이나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루는 처마선, 각부 부재를 다른 석재로 사용한 점, 상층기단 갑석(甲石)의 받침을 만든 수법 등은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 때문에 무량사오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백제계 석탑으로 보고 있다.

옥개석 처마 밑에 빗물이 탑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파놓은 절수구(切水溝)가 보이는데 이는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많은 양식을 절충하여 조화롭게 만든 고려 초기의 탑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사진 5. 벌어지고 있는 기단부



오층석탑 기단부의 각 부재가 벌어지고 기단부 자체가 침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시적이고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따른 지반 침하로 인한 현상으로 석탑에 대한 구조적 안전진단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영정각(影幀閣) 주변의 고목에서 흰개미가 발견되었고 원통전(圓通殿)의 기둥에서 흰개미로 추정되는 흔적을 보이고 있어 정확한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 마곡사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건물 자체가 피해를 입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사찰 경내에 흰개미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언제든지 불전으로 침입할 수 있다는 뜻이므로 시급한 방제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흰개미는 지중성(地中性)으로 땅 속으로 다니는 흰개미이기 때문에 목조건물까지 땅을 파고 침입하여 피해를 입히더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선방제가 필요하다.

현재 공사 중에 있는 향적당(香積堂)의 경우도 기둥 아랫부분이 삭아 있었는데 이 역시 흰개미의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여져, 해체하면서 나온 부재를 조사해서 그 원인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량사는 김시습(1435-1493)이 불교에 입문하여 전국을 떠돌다 말년에 이곳에 머물다가 1493년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시습은 전국을 돌아다닐 때 여러 사찰에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무량사는 김시습이 그 삶의 마지막을 내려놓은 장소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찰에서 약간 떨어진 언덕위에 김시습의 사리탑이 세워져 있고, 누가 그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보물 제 1497호로 지정되어 있는 김시습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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