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의 마지막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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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의 마지막 숙제
  • 관리자
  • 승인 2012.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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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대흥사

올해로 세수 78, ‘나’를 버림은 월탄스님이 평생을 붙들었던 화두이다. 스님이 그렸던 세상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구현될까. 한국 불교의 전환기를 그대로 몸으로 지켜온 월탄 큰 스님, 스님은 이제 이 곳 단양 땅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폐사, 대흥사를 중심으로 그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1981년, 동학운동 과정을 기록한 용담유사가 단양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단양이 동학운동의 최전선이었다는 반증이다. 더군다나 용담유사를 기록한 곳이 현재 대흥사가 위치한 대강면의 여규덕 정계현의 집이라는 점을 보더라도 대흥사는 역사의 참화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일본군을 필두로 한 관군과 이에 맞서는 동학군의 치열한 격전 속에서 202칸의 거대한 대흥사는 흔적도 없이 불타 버렸다.



인터넷에서 대흥사를 검색하면 해남 두륜산 자락의 대흥사 자료만 가득하다. 그 어디에서도 충북 단양 대흥사의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법주사 주지를 지내셨던 월탄 큰 스님이 이런 소식을 접한 것은 십수 년 전의 일이었다. 동안거를 끝내고 우연히 충북 단양의 대흥사 근처 온천을 찾았다가, 인근에 큰 절터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슴이 뛰더군. 이상하게도 다른 폐사와는 느낌이 남달랐어. 더군다나 동학군 이야기를 들을 때는 더욱 그랬지.”



한 눈에 보기에도 잡풀만 웃자라서 절터로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바닥에 흩어진 기와와 구들, 주추 등을 확인하고는 틀림없이 큰 가람이 있었다는 확신을 했다. 아랫마을로 찾아가 마을의 역사를 소상히 꿰고 있는 연로한 노인들에게서 대흥사라는 거찰이 존재했음을 듣게 되었다.



그 길로 제자들과 대흥사지를 복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관계기관의 도움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가 없었다.




▲단양 대흥사 경내

“남한 땅에 폐사지가 어디 한 둘인가. 그걸 다 지원해달라고 하면 염치없는 노릇이었지. 아무리 대흥사가 의미 있는 사찰이라 해도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폐사지 중 하나일 뿐이었어. 많은 공력이 드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초기에는 내가 감당할 몫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지”



큰 스님은 제자들을 독려해서 우선 대흥사의 역사적 근거자료를 수집하기에 이른다. 눈길을 끈 최초의 자료는, 비록 자세하지는 않지만 영조 때 출간한, 도읍의 기록을 남겨놓은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충청도 단양 사찰조였다. 기록엔 202칸의 거찰이었으며, 승려가 100여 명, 부처님의 불제자인 500라한이 모셔진 대불당, 그리고 부지도 6000평이 넘었다고 했다. 월탄 큰 스님은 이 기록을 중심으로 좀 더 세심한 연구 끝에 불에 탄 직후 금강산 유점사로 500라한이 옮겨졌으며, 희방사로 동종이 옮겨졌음을 알게 됐다. 더군다나 부속암자였던 원통암은 나옹선사가 창건한 암자라는 것과 삼존불의 존재까지도 파악하게 되었다. 아마타불좌상은 대선사 단하 선사(옛날 중국 당나라 때에 단하천연이라는 이름의 고승, 이 고승은 나무 불상을 반으로 갈라서 불에 태우면서 득도했다.)를 감히 흉내 낸 대처승에 의해 파괴되었고, 대세지보살은 마하 스님에 의해 사인암으로 옮겨가고 마지막 한 점 관세음보살상은 제천 원각사에 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통탄했다.



“노욕은 아니야. 내 그 동안 부처님 제자로 이제 세수도 만만치 않은데, 이 대흥사 복원과 역사를 밝히는 일이야 말로 내가 불제자로서 할 일이라는 사명감 같은 것이었지. 누군가 이 일은 시작하고 맺어야 하는 것이거든. 모든 것은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해. 그 밖에 숱한 유물들의 행방을 지금도 찾고 있으니 말이야.”



큰 스님은 대략의 자료들을 수집한 연후에 산세가 험해서 그저 겨우 발만 디딜 수 있는 원통암을 찾아든다. 대략 3주일을 머물면서 기도 정진하였다. 그리곤 마침내 아무리 고달프고 힘이 들더라도 대흥사와 그 말사인 원통암과 청련암을 제 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원통암

“원력으로 세우고 세워서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 일념뿐이야.”



대흥사의 유물들은 모두가 다른 곳으로 혹은 북한으로 옮겨졌다. 더불어 소소한 유물까지도 사오십 년 전 대흥사터에 살았던 화전민들에 의해 파괴 되었을 터이다. 대흥사의 본 모습 찾기는 그래서 많은 고충이 따를지도 모른다. 처음 땅을 되찾는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옛 대웅전 터가 일반인 소유였던 것이다.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소유주를 찾아가 사정하고 매달리면서 시세보다도 몇 십 배에 이르는 값을 치르기도 했다.



중부 내륙의 중심 사찰이었던 대흥사, 우리민족의 역사적 풍랑 동학과 함께 사라져간 대흥사는 이제 노스님의 진심어린 역사 되찾기 속에서 다시금 세상에 나오려 꿈틀거리고 있다. 황령산 자락에 울려 퍼졌을 민중의 아픔, 동학군의 그 울음이 어디선가 월탄 스님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내가 세수로 일흔 여덟이야. 하지만 나는 이 일을 꼭 끝내야 편해질 것 같아.”



대흥사는 이제 몇 점 남지 않은 유구를 통해 대한민국의 전통적 기반을 중심에 둔 사찰로서 거듭나야 한다. 역사는 묻히고 사라지면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발굴하고, 찾아내서 우리 민초 속에 큰 화두로 던져졌을 때 유산이요, 향기가 되어서 대를 존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월탄큰스님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화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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