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N 뉴스 - 고려청자의 기원,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국보 승격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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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N 뉴스 - 고려청자의 기원,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국보 승격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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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2.2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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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사진=문화재청)

-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및 고려‧조선 금속활자 서책 등 2건은 보물 지정 예고 -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우리나라 청자 제작의 시원(始原)이라 일컬어지는 보물 제237호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를 국보로,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와 고려‧조선 시대 금속활자로 찍은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바닥)>▲(사진=문화재청)
국보로 지정 예고되는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靑磁 ‘淳化四年’銘 壺)」(보물 제237호, 1963.1.21. 지정)는 고려 태조(太祖)를 비롯한 선대 임금들의 제사를 위해 건립한 태묘(太廟)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왕실 제기(祭器)다.

굽 안쪽 바닥면에 돌아가며 ‘순화 4년 계사년 태묘 제1실 향기로서 장인 최길회가 만들었다(淳化四年 癸巳 太廟第一室 享器 匠崔吉會 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이를 통해 993년(고려 성종 12) 태묘 제1실의 향기(享器, 제기)로 쓰기 위해 장인 최길회가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는 1910년경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으나, 발굴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며, 일본인 소장가들을 거쳐 1957년 이화여대가 구매해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에 위치했던 태묘는 송나라 제도를 참고해 992년(고려 성종11) 12월에 건립되었고, 제1실에는 태조와 태조비의 신주(神主)가 봉안되었다고 한다.

이 항아리는 문양이 없는 긴 형태로서 입구(口緣)가 넓고 곧게 서 있으며, 몸체는 어깨 부분이 약간 넓은 유선형(流線形)이다.

표면에 미세한 거품이 있으나, 비교적 치밀한 유백색의 점토를 사용하여 바탕흙(태토, 胎土)의 품질이 좋다.

표면에는 은은한 광택과 함께 미세한 빙렬(氷裂)이 있고, 군데군데 긁힌 사용 흔적이 보인다.

빙렬(氷裂)이란 마치 얼음이 깨진 듯 도자기 표면에 유약이 굳으면서 생긴 미세하게 갈라진 금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징은 1989년~1990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2호 가마터에서 발굴한 「‘순화3년’명 고배(’淳化三年‘銘 高杯)」를 비롯해 여러 파편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역시 원산리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태묘의 제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향후 북한 지역 청자 가마터와 비교연구 등을 통해 우리나라 청자 생산의 기원에 대해 더욱 명확하고 종합적인 확인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순화3년’명 고배(‘淳化三年’銘 高杯)에서 고배는 높은 굽다리를 붙인 접시로, ‘순화3년’명 고배의 굽 안바닥에 ‘순화3년(992) 임진년에 태묘 제4실 향기로서 장인 왕공탁이 만들었다(淳化三年 壬辰 太廟第四室 亨器 匠王公托 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황해남도 원산리 가마터가 고려 초 태묘에서 사용한 왕실제기의 제작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는 현전하는 초기청자 가운데에서 드물게 크기가 큰 대형 항아리로 바탕흙(胎土)의 품질이 우수하고 형태가 비슷한 사례가 없는 유일한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그리고 굽 안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연도, 기명의 용도와 사용처,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또한, 황해남도 원산리 가마터에서 발굴된 ‘순화’명(‘淳化’銘) 파편들과 비교하여 고려 왕실 제기 생산 가마터를 비롯해 다양한 제작여건이 추가로 밝혀짐으로써, 초기청자를 대표하는 유일한 편년자료로서의 가치와 위상이 매우 높다.

우리나라 청자 발달사를 밝히는데 필수적인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사진=문화재청)
한편, 보물로 지정 예고되는 「군위 인각사 출토 공양구 일괄(軍威 麟角寺 出土 供養具 一括)」은 2008년 인각사(麟角寺)의 1호 건물지 동쪽 유구(遺構)에서 발견된 유물로서 금속공예품과 도자류로 구성된 총 18점의 일괄 출토품이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인각사(麟角寺)는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인각사 근처에 우뚝 솟은 바위 벼랑에 기린이 뿔을 걸었다 하여 이름을 ‘인각사’라 붙였다고 한다.

일연스님이 머물며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완성한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각사 출토유물 - 금동사자형 병향로>▲(사진=문화재청)
18점의 일괄 출토품 중 ‘금속공예품’은 총 11점으로 금동사자형 병향로(金銅獅子形 柄香爐), 향합(香盒), 정병(淨甁), 청동북(金鼓) 등으로 구성되었고, 사찰에서 사용하는 청동제 의례용품들로서 조형성이 뛰어나고 섬세한 기법이 돋보인다.

<인각사 출토유물 - 가릉빈가>▲(사진=문화재청)
특히 불교에서 천상의 새를 상징하는 금동가릉빈가상(金銅迦陵頻伽像)은 그동안 출토 사례가 거의 없어 도상적(圖像的)으로 희귀하며, 청동발(靑銅鉢)과 청동뚜껑 역시 통일신라 시대부터 유행한 전형적인 형태로서 당시 공예기술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각사 출토유물 - 청자 7점>▲(사진=문화재청)
또한, ‘청자’ 7점은 모두 당나라 월주(越州)에서 생산된 중국 도자로 추정된다.

발굴 당시 포개진 채 한꺼번에 발견되었고, 함께 출토된 금속유물의 제작 시기 등을 추정하는데 참고가 된다.

청자는 8세기 말~10세기 전반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내 출토 중국 도자의 편년기준을 제공할 뿐 아니라 국내산 청자 기법을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신라 말에서 고려 초 금속공예품들은 대부분 사찰이나 박물관 등지에서 전해 내려오던 유물인 반면, 인각사 출토 공양구는 보기 드물게 땅속에서 온전히 출토된 것들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보기 드문 금속기명과 청자 유물들이 일괄 출토되어 명확한 출토지와 편년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 고려본>▲(사진=문화재청)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新刊類編歷擧三場文選對策 卷五~六)」은 원(元)나라 유인초(劉仁初)가 원에서 시행한 향시(鄕試)와 회시(會試), 그리고 전시(殿試)의 ‘삼장(三場)’에서 합격한 답안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1341년 새롭게 편집한 책의 권5와 권6에 해당한다.

총 72권으로 편찬된 이 책에 대해서는 그동안 고려의 전래 기록과 실례가 증명되지 않았으나,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이 알려짐에 따라 고려 시대에 유입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향시는 지방에서 치른 과거 1차 시험이고, 회시는 초시(初試) 급제자가 서울에서 보는 2차 시험을 말하며, 전시는 2차 시험 통과자들이 임금 앞에서 본 시험을 말한다.

이 세 종류의 시험을 통틀어 ‘삼장(三場)’이라고 불렀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대상은 총 72권 중 임집(壬集)에 해당하는 고려본(2권 2책)과 조선본(2권 2책) 권5~6에 해당한다. 모두 금속활자로 인출(印出)하였고 일부 떨어져 나간(缺落) 부분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간행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려본은 판심(版心)의 규격 등이 조선본과 다르고, 경의(敬意) 처리법의 적용과 권차(卷次, 고려본의 ‘壬’을 조선본은 ‘任’으로 오기)나 편자(編者, 고려본의 ‘安 成’을 조선본은 ‘成案’으로 도치)의 표기에서 조선본보다 앞선 시기의 특징을 보인다.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 조선본>▲(사진=문화재청)
조선본의 경우 1403년(태종 3) 주조된 계미자(癸未字)를 바탕으로 간행되었다. 계미자는 1420년(세종 2) 경자자(庚子字)를 주조할 때까지 사용된 15세기 대표적인 금속활자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정확한 간행연대를 가진 현존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이 고려본은 인출 시기와 관련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 말 금속활자의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금속활자본의 변화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렇듯 「신간유편역거삼장문선대책 권5~6」의 고려본과 조선본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금속활자의 전승 현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교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사례이다.

아울러, 원나라에서 시행된 과시(科試) 답안자료의 국내 유입을 보여주는 유일하게 알려진 자료라는 점에서 보물로서 지정 가치가 충분하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 예고하는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취재팀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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