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가 ‘채응언 선생’
상태바
7월의 독립운동가 ‘채응언 선생’
  • 관리자
  • 승인 2005.06.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지난 29일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의병장 채응언(蔡應彦) 선생을 2005년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다고 밝혔다.



채응언은 1879년 평안남도 성천군의 가난한 농가 출생으로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부대에 투신했다. 1908년 황해도 안평의 순사주재소와 수안 헌병분견소, 함경남도 마전도 순사 주재소를 습격했고,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을 계속했다.














▶ 1915년 7월 군자금 모금 중 치열한 저항 끝에
잡힌 채응언 의병장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로 3~4백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며 효과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했으며, 특히 1913년 황해도 대동리와 선암의 헌병분견소를 기습해 일본군 헌병을 처단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도 전개해 크게 명성을 떨쳤다.



또한, 평남 성천 산악지대에서 치열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해 20명 이상의 일본 군경과 일제에 동조하는 세력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해 의병부대를 유지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매진했다.



일본은 채응언을 잡기 위해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는 한편,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1915년 7월 군자금을 받기 위해 평남 성천 마을로 내려온 채응언은 지역주민의 밀고로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채응언은 살인 및 강도죄목으로 기소한 일본 법원에 불복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 의병투쟁이라고 외치다 그해 11월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1908년에 의병봉기의 이유와 의병이 지켜야 할 15개조 규칙을 적은 채응언 격문









약 8년에 걸쳐 관북·관서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펼친 채응언은 그가 일본에 잡힘으로써 의병전쟁이 종식되었다고 언론에 보도될 만큼 공훈이 컸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독립기념관에서는 7월 한달 동안 채응언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한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전시할 계획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