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126-1 번지에는 조선 초기 개국공신인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公)과 아들 손자에 이르는 3대에 걸친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군은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74호(1990.6.18)로 전체 면적이 4만5천여 평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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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에는 순흥 안씨 8세손 흥녕부원군 양도공 안경을 비롯해 10대에 이르는 3대의 묘 5기와 양도공 부조묘가 있고 이외에도 조선시대 이품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들에게 세워준 신도비 3기와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인 장명등, 능 앞에 세우는 문, 무관의 형상으로 된 돌인 문 ․ 무인석 등의 석조물이 조성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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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는 순흥의 토족 성씨이다. 고려 신종(神宗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된 시조 안자미(安子美)가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증손 안유(安裕=珦으로 개명하였다가 조선조 문종 어휘와 같게 되어 초명으로 쓴다)가 크게 현달하여 생활 근거지가 개성으로 나뉘어져 살게 되었다. 시조 자미는 아들 3형제를 두었으니 영유(永儒), 영린(永麟), 영화(永和) 이며 이를 각각 1파, 2파, 3파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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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의 후손에 14개파, 영린의 후손에 4개파, 영화의 후손에 4개파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생활근거지가 파주 금촌으로 옮겨졌는데, 여러 사화를 겪으면서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종가는 서울 도동에 있다가 다시 이북 연백으로 옮겨졌다. 특히 관향지 순흥에 살던 종족들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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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 조상으로는 시조의 증손 안향이 1260년 18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랑과 감찰어사, 상주판관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령왕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설치, 후진양성에 진력하여 유학의 학풍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門下)에서 백이정(白이正), 우 탁(寓倬) 등 훌륭한 유학자가 배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문묘(文廟)를 비롯한 장단의 임강서원( 저작권자 © cpn문화유산 문화재T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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