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으로 이사가지 못한 현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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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으로 이사가지 못한 현묘탑
  • 관리자
  • 승인 2005.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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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





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67)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시대에 일 본의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었으며, 국보 제 1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 내에 있다.





 







 



국보 제101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부도가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시간의 흐름속에 탑의 모양도 닳아가고 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글의 내용으로 보아 지광국사가
입적한 시기인 고려 선종 2년(1085)경에 이 부도를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부도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1마리씩 놓여 있던 사자상은 일찍이 도둑맞아 지금은 한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6.25 전쟁때 파손된 현묘탑 일부분

 







 






이 부도탑과 자리를 함께하며 비바람을 견딘 다른 석조 문화재는 모두 떠나 이미 용산에 자리를
잡았음에도 유독 이 부도탑만 떠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겉모습은 화려하기 짝이 없으나, 속내 또한 허술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멀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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