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 이상설'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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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 이상설'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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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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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 이상익과 함께 한 이상설(오른쪽)


독립기념관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 12. 7 ~ 1917. 3. 2)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직마을에서 경주 이씨 이행우 선생과 벽진 이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용우 선생의 양자로 편입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치는 등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25세 때인 1894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해 철회운동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의정부 참찬의 자리에 있으면서 을사늑약의 강제를 막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자결을 시도하며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했다.














▶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 반대하며 올린 상소문(1905.6.22)







▶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문(1905.6.22)







선생은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해 철회운동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의정부 참찬의 자리에 있으면서 을사늑약의 강제를 막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자결을 시도하며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했다.













▶ 광무황제의 헤이그 특사 임명장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1906년 국외로 망명한 선생은 북간도 용정촌에 근대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듬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선생은 이준, 이위종 열사와 함께 광무 황제의 특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의 무효화와 일제침략의 실상을 열강에 호소했다. 유럽순방을 마친 선생은 미국에 1년 남짓 머물면서 한인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여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헤이그 특사 공고사(控告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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