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한이 서려있는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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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한이 서려있는 삼전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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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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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은 지난 2월 17일 보물 제1462호로 지정된





1636년 12월 2일,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친히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청나라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침공하고, 청군의 침공을 몰랐던 조정에서는 청군의 선봉부대가 개성을 지날때
쯤인 13일에야 겨우 알게된다. 이에 인조와 신하들은 14일 밤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그러자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청 태종
汗(칸)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군을 집결시키고 남한산성 고립작전에 돌입한다.

남한산성 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아무리 절약해도 겨우 50일 정도를 넘길 수 없는 식량밖에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봉림대군(인조의
둘째아들)이 피해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조선은 결국 1월 30일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이때의 상황을 왕조실록에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니 다음과 같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 汗(황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쪻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 사적 제 101호 삼전도비(三田渡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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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항복을 받은 청태종은 그러한 사실을 자신의 공덕으로 여기고 비를 세울 것을 명하니 그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으리라.



이에 당대의 명문장가인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다. 장유 등 모두
상소하여 사양을 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병이 있어 짓지 못한 이경전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의 글이
임금에게 바쳐졌으나 조희일은 채용되지 않기를 바라고 일부러 거칠게 지어 결국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청나라로 보내 그들이 채택하기를
요청하였다. 篆額(전액)도 처음엔 東陽尉(동양위) 申翊聖(신익성)이 쓰도록 명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결단코 사양하였다는 기사가
왕조실록에 보인다. 청의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하지 못하고 이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쓰라고 하여 임금이 이경석에 명하여 고치게 하니 현재의 비문이다.



비석 전면에는 몽고문자 20행과 만주 문자 20행으로 되어 있고 뒷면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三國의 문자가 한 비에 동시에 기록된
유일한 비석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