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서울시 문화재, '장충단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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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서울시 문화재, '장충단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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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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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6월의 서울시 문화재'로 중구 장충동 2가에 소재하고 있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호 '장충단 비'를 선정·발표했다.



장충단은 고종 32년(1895) 경복궁에서 일어난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시해사건인 을미사변 때 일본인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순사(殉死)한 시위대(侍衛隊)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1895)과 궁내부(宮內府) 대신 이경직(李耕稙, 1841∼1895)을 비롯한 여러 장졸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광무 4년(1900) 9월 고종 황제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세운 사당이다.



사당건립 후 매년 이곳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으나 1910년 일제강점 이후 폐사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이라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했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때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肉彈三勇士)의 동상과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 살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혼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웠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건물이 파괴되면서 장충단비만 남게 됐다.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1900년 11월에 세워졌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석을 얹은 간략한 형식이다. 앞면에 새긴 "奬忠壇"이란 전서(篆書) 제목은 뒤에 순종(재위 1907∼1910)이 된 황태자의 예필(睿筆)이며, 뒷면에 새긴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짓고 썼다. 1910년 이후 일제가 뽑아버렸던 비신을 광복 이후 찾아서 현재 신라호텔 자리인 영빈관 내에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으로 옮겼다.














▶ '6월의 서울시문화재'로 선정된 장충단 비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대황제 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上聖)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의 반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마침내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바친 사람이 많았다. 아! 그 의열(毅烈)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名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제향(祭享)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특별히 충성을 기리는 뜻을 표하고 이에 슬퍼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제단을 쌓고 비를 세워 표창하며, 또 계속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百世)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심(軍心)을 분발시킴이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



서울시는 6월, '호국의 달'을 맞이해 을미사변때 명성황후를 보호하려다 죽음을 당한 분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장충단비의 의미를 되새기는 차원에서 '6월의 서울시 문화재'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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