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금빛도료 ‘황칠’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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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금빛도료 ‘황칠’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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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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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0대 임금 연산군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인물도






오늘 4월 6







 



 








▶토기 바닥에 남겨진 황칠덩어리







 







전설의 금빛 도료로 알려진 ‘황칠’의 실물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5일, 황남동 유적에서 검출된 유기물질에 대한 분석결과, 신라의 ‘황칠(黃漆)’임이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확인된 황칠은 유적에서 출토된 인화문 토기의 바닥에 남아있는 유기물질 덩어리에 대한 지방산 분석을 하기 위해
일부시료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 분석 의뢰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황칠이란, 생칠 또는 주칠, 흑칠과 같이 여러 종류의 공예품 표면을 칠하는 공예의 한 기법으로 황금빛이 나는 천연도료이다. 높이
약 15m의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에서 채취한 액체를 정제하여 사용된다. 빛깔이 화려한 금빛이며, 내구성을 강화시켜 제품의
수명을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향(安息香)이라는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무에서 체취·가공된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금속과 목재, 종이 등의 도색을 위해 삼국시대부터 고급제품의
외장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황칠은 조선시대 중국의 지나친 조공요구, 조정의 공납요구 및 일제강점기를 거침에 따라 원목뿐만 아니라 가공기술마저도 그
명맥이 유지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선』에 「황칠」이라는 한시가 있는데, 여기에 “공납으로 해마다
공장으로 옮기는데 서리들 농간을 막을 길 없어 지방민들이 이 나무를 악목(惡木)이라 여기고서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라는 대목을 보면 당시 황칠나무에 대한 남획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건으로 인해 황칠은
그 실체를 밝히기 어려웠으나 이번 분석결과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황칠에 대한 역사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황칠이 발견된 황남동 123-2번지 유적 전경







 







땅의 악한 기운을 누르고 선한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건물 기둥자리에 의도적으로 매납(埋納)한 지진구(地鎭具)로 추정되는 토기에
황칠 덩어리를 담아두었다는 사실은 이 황칠이 고대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물질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발굴한 토기 내부의 유기물질이 황칠성분이라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황남동의 대형
건물유적이 신라국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시설이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며 “황칠이 확인된 대형 건물지와 근거리에
위치한 월성이 신라의 궁성이었을 가능성이 보다 높아졌다” 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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