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 바위와 다산초당

2009-06-26     관리자

강진만을 가르며 휘돌아 치는 구강포 줄기의 샛노란 하늘 햇살, 그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서 생전 백련사 주지 혜장 아암은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초당의 다산은 여가를 그토록 즐겼을까. 넉살 좋은 풍광은 다산의 찻잎에서 찻잔에서 3무, 번뇌의 세상을 말하는 것 같고 초여름 가벼운 농을 던지듯 철새들의 까닭 모를 지저귐은 초의선사의 멋들어진 해학 같이 해탈하듯 동백이 안고 품었네.






▲ 강진만


저 멀리 길 가운데로 천주와 석가모니의 찬란한 교류가 길을 만들고 그 길은 소통을 위한 가교(家敎)라 한다네. 그 글에 서면 다산의 천주도 아암 혜장의 석가모니
도, 다 하나의 삶이요, 멋이요, 거룩함이었다네. 이치를 알면 죽은 듯하여 고요하고 이치에 눈뜨면 양심이 되어 고뇌하고 번민했을 그 길,


누군들 있어, 이 시대 밖의 세상과 소통하리요. 그것은 진보와 보수도 아닌, 인(人)이요, 인(認)이니 사람은 그저 참는 것이라, 세월과 소통을 알리는 참다운 지혜를 알기에 일필휘지의 추사도 머물다 지치면 보정산방(寶丁山房)에 머물렀다네. 그 편안함을 통한 느슨함의 또 다른 소통을 위하여.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밖에 서보면, 연지석가산의 좁쌀 잉어가 가벼운 울림에 물결은 어느덧 잔주름치고, 그 위에 간헐적으로 흐느적거리면 부유하는 나뭇잎은 살짝 주역으로 풀어볼까, 하다가 이내 뒤돌아서고 만다. 어쩌면 고매한 학문이기 이전에 세상 이치일 따름이요, 권력의 무상함은 그 역시 낳고 죽는 것 그것 이상의 소통의 한 방편일 따름이다.






▲ 연지석가산

정석(丁石)으로 각인한 아픔을 쪼아내, 손등은 피 흘리고, 고통을 다스리고자 재차 정에 혼을 쏟아 부어 보니, 어느덧 산중엔 대나무처럼 가득한 고집뿐이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 허무한 고통을 참고 있을까 하여 뒤돌아보니 산중엔 호랑이 가득하여, 그보다 더 무서운 아전들의 횡포에 신음하는 백성들뿐이었네.


찻잔의 고요함은 노동의 시 한 구절처럼 평생의 불평스러운 일들을 모두 털구멍으로 흩어져 나가게 하였다네. 시가 무엇이요, 아집이 무엇인가. 다 내려놓고 다 부질없는 것은 시장 바닥에 허허로운 햇살 한줌보다 가치 없는 욕망이라네.


세상을 바꾸어보리라 했던 노장의 죽음은 부엉이 바위에서 세상사는 바른 이치를 절규하듯 메아리치며 생을 마감할 때, 그 반대편에서는 부질없는 욕망의 꿈 타래를 붙들고 비웃듯 진실을 갖은 방법으로 비틀어댔지만 그 언젠가는 비열함의 그 끝에서 남도 북도 아닌, 핵무기도 개성공단도 아닌, 그저 주검의 싸늘한 작은 비석일 따름이네.


다산에 서면 추사의 찬연한 글씨와 초의의 작은 소중함을 알게 해준 찻잔과 아암의 주역 한 장이 나붓기네. 다산의 통로에 들어서면 어디가든 만나면 길이요. 어디선가 마주보면 본 듯한 그늘과 소슬소슬 불어대는 나무잎사귀, 그래서 우리는 “본듯함”과 “만난 것” 같은 것과 또 다른 인연을 맺으니, 그게 동암에서 써내려갔던 다산의 519권 찬란한 학문 보다 나은 이치일지도 모른다.


다조에 앉아서 시름하듯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어보니, 그것 역시 무상함의 소통이요. 회화처럼 그려지는 인생의 회한뿐이다. 늙어 이곳에 와보리니, 아 시대의 저주처럼 들리는 광장의 불임의 기간들, 언젠가는 막말하고 죽어간 이로 기억되는 서울 시청 앞 마이크 소리에서 흘러나온 궤변이 통곡을 하리라.


대통령이 아닌 한 개인의 세상 등짐에도 우리는 아픔을 전하거늘, 이 시대의 소통을 위해 마지막으로 택한 그 거룩한 길에 고통을 어찌 통분으로 여기지 못하고 연지석가산의 대통을 들고 후려치는 듯한 노망을 들어야 할까. 삽 한 자루 쥐어줘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하리니, 그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진창에 갈갈이 찢겨진 철학이 우르르 쏟아지는 것 같으리라.






▲ 노무현 전 대통령(사진출처 :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


사랑하라, 이웃을. 그건 진정한 소통이었다. 사랑하라, 그가 진보도 보수도 아닌 사람으로 사랑하라. 그저 안고 품어라. 그게 민주주의 독재든 그게 사람인 까닭이리라. 탐하지 마라, 남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