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수륙재’의 의미를 논하다

용주사의 수륙재는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

2025-08-07     CPN문화재TV

용주사는 정조대왕이 고려 시대 창건한 사찰 ‘갈량사’를 폐찰(廢札)하고 그 터전 위에 장조(사도세자)대왕을 위한 봉헌의 뜻을 받들어 세워진 사찰이다. 당시 한양(서울) 도심권을 중심으로 북부 지방의 봉선사와 남부 지방을 양분하는 대한민국의 중요 사찰로서 인구 1천만을 수용하는 우리 국민의 정신적 문화유산의 가치가 매우 높은 사찰이다.

 

특히 고려 갈량사 때부터 이어져 온 수륙재는 오랜 역사의 문화적 자원이다. 이미 동해의 삼화사와 서울 진관사ㆍ봉은사의 수륙재는 국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사찰 문화유산 활용 중심사찰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용주사의 수륙재는 그 수려한 역사와 사격(寺格)으로 보았을 때 진즉에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 경기도와 화성시 또한 사찰의 무심(無心)과 함께 지정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번에 걸친 학술용역 진행은 있었지만 정작 무형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학술 자료를 취합하는데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수륙재의 외형적인, 즉 지화ㆍ제물ㆍ기물ㆍ벽화 등의 다른 방편의 학술자료 취합에만 그쳤던 것이다.

 

용주사 수륙재 모습(사진=인터넷)

 

더 이상 무형문화유산 지정을 늦출 수 없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바, 금년 10월 18일 치러지는 수륙재는 무형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기본적인 자료 취합에 치중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용주사의 수륙재는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물과 육지에서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 의례를 통해 만물, 만상의 평온을 추구했다. 시초는 중국 양나라 무제(6세기)가 처음 시행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행해졌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적 이념과 충돌하며 국가 행사로 금지되기도 했으나, 특별히 용주사는 자체적으로 정조의 효사상과 맞물려 전승되었다.

 

숭유억불 시대인 조선 조정에서 수륙재를 금기시 했지만, 특별히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애틋한 마음으로 당대에 용주사만큼은 수륙재가 성대하게 치러졌던 것이다. 이를 발굴하고 보전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우리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

 

더 이상 정리되지 못한 채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또 다른 당위성, 국가유산청ㆍ 경기도ㆍ 화성시ㆍ 용주사가 힘을 합해 당대부터 끊임없이 전승되어 온 용주사 수륙재의 모든 무형의 자산을 정리하고 새롭게 정의하여 국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수도 서울을 반경으로 남부권역 1천만 인구의 열망이기 때문이다.

 

오는 10월 18일 용주사의 수륙재가 다시금 그 길을 열어 앞으로 천천만만년이 유전되어 우리 조상의 슬기로움, 자연을 향한 아름다운 정신이 세상의 큰 열망으로 부처님의 온전한 가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