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옹주와 달리 화완옹주는 애교가 많아 영조에게 사랑은 받았지만
성정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자신의 올케가 되는 혜경궁 홍씨를 무던히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정조의 왕비가 되는 효의왕후 김씨 역시 화완옹주로부터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를 받는다.
화완옹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집안과, 당시 총애 받던 후궁인 문숙의, 노론계의 신하와 한패거리가 되어 사도세자를 끊임없이 음해하여 결국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는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화완옹주는 실세로 급부상하여 영조 말년의 정사는 화완옹주가 좌지우지 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양지가 음지 되는 법, 음지가 양지되는 법은 만고의 진리인 듯, 갖은 고통 속에서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에 의해 화완옹주는 철저히 파괴되는데, 양자 정후겸은 귀양 뒤 사사되었고, 화완옹주는 궐 밖으로 쫓겨났다. 그리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조선의 왕의 딸 중에서 정치에 개입한 딸은, 특히 옹주라는 신분으로는 화완옹주가 유일하다.
그런 화완옹주의 무덤은 남편인 정치달과 함께 문산에 있다. 파주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