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조선의 청백리 오리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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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은 조선의 청백리 오리 이원익
  • 김민석 기자
  • 승인 2020.03.26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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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서원(사진=CPN문화재TV)
오리서원(사진=CPN문화재TV)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조선의 청렴한 관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왕실 종친 출신으로 태종 이방원의 서자이자 세종대왕의 서제인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4세손이다.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全州).

 

이원익은 156923살때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573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성절질정관(聖節質正官)의 서장관이 되어 하사(賀使)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이듬해 예조랑(禮曹郞)에서 뽑혀 황해 도사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 그는 이렇게 중앙의 청요직을 두루 거치는 가운데 원칙을 지키는 관료로 정평이 났다.

 

이원익의 스승도 같이 청렴함을 대표하는 재상이었던 이준경(李浚慶)이었기 때문에 이원익은 당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남인 출신이었고 유성룡 및 그의 제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그가 37살이 되던 1583년 율곡 이이를 탄핵하는 동인들과 나란히 서기도 하는 등 동인으로서의 입장을 취한 것을 보아 비교적 중도 노선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당파 싸움이 치열하던 시기엔 파직이 되었다가 다시 복직하는 등 거친 정치판을 거치긴 했지만 그의 청렴함은 꾸준했다. 그가 41살이 되던 1587, 안주목사로 임명되었고 변방의 수령직을 수행하던 그 시기에 관할 지역의 각종 제도를 정비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을 거치고 49살이 되던 1595년에 우의정이 되고, 중국에 건너가 외교로 세운 공을 인정 받아 선조는 1599년 그를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58살 때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62살 되던 해(1608)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의 이원익은 전란으로 힘들어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김육의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다. 남인에서는 김육이 서인이라는 이유로 대동법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였으나, 그는 당색을 초월하여 적극적으로 김육을 지지했다고 한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후금이 침입해 오자, 오리는 소현세자와 함께 전주로 내려갔다가, 강화가 성립되자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인조를 호종하여 환도했다. 이후 한양과 향리 금천衿川(지금의 경기 광명시)을 오가며 국정에 필요한 처방들을 내놓았던 오리는 16348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오리 이원익(사진=CPN문화재TV)
오리 이원익(사진=CPN문화재TV)

 

 

저서로는 오리집(梧里集)· 속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가 있으며, 가사 고공답주인가(雇貢答主人歌)를 남겼다. 그가 남긴 저작들 가운데에는 소차(疏箚)등 공거문(公擧文)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일기(日記)와 고사한화(古事閑話)와 같은 필기류도 전한다.

 

오리 이원익은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에 5번이나 임명되었으며, 그와중에도 청렴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오리서원은 청렴한 관료생활을 해온 오리 이원익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01년 그가 잠든 묘지의 바로 옆 광명시 소하동에 건립되었다. 본래는 오리 이원익 기념관이었으나 기념관의 취지를 더욱 널리 알라고 보다 현대화된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발전을 모색하면서, 오리서원으로 새롭게 개관한 것이라고 한다.

 

취재팀 김민석 기자

kimminseok@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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