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문수막새는 완전한 형태로 1례가 수집되었는데 판육(瓣肉)으로 이루어진 세판계의 8엽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자방은 원형돌기로 대체되었고 주연부가 생략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일본기와임을 알 수 있다. 회흑색의 경질기와로 수막새의 지름은 13.0cm이고 두께는 1.7cm가량이다.
잔기와는 일본 에도시대부터 제작된 일본식기와로 수키와와 암키와, 수막새와 암막새가 하나로 제작된 일체형기와로 일제강점기에 일본가옥에 사용되었다. 무문의 수막새와 암막새가 하나로 제작된 잔기와는 약간 파손되었으나 일본식기와임을 알 수 있다. 회흑색의 경질기와로 수막새의 지름이 8.5cm이고 두께가 1.7cm가량이다.
착고는 1례가 수집되었는데 완전한 모습이다. 착고는 마루의 두 기왓등사이의 기왓골상단에 사용된 기와로 수키와의 양단을 알맞게 절단하여 제작하게 된다. 착고는 광복이후인 현대에 제작된 기와로 표면이 무문이고 이면에 포목흔적이 생략되었다.
의성 석불사에서 출토한 기와류는 암·수키와인 기본기와와 수막새 및 잔기와 등으로 구분된다. 기와는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와 중기, 조선 초기와 중·후기 및 근현대의 작례를 나타냈는데, 석불사의 초창과 그 연혁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하며 제작시기의 다양함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의성 석불사는 기와를 통하여 고려와 조선시대 및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법등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와는 표면에 새겨진 고판문양과 이면의 포목흔적 및 측면의 분할흔적에 따라 기와제작에 따른 각 시대의 시기와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의성 석불사는 우상문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기와를 통하여 고려 초기까지 초창시기가 소급될 수 있어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조선시대의 기와는 암·수키와가 많이 수집되었는데, 우상문과 복합문, 창해파문과 집선문 등이 새겨져 다양한 번와활동(燔瓦活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근현대의 기와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연화문수막새와 잔기와, 광복이후에 제작된 착고 등으로 구분되어 장기간에 걸쳐 법등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80년대에 찍은 석불사의 석굴법당 사진(사진 21)은 의성 석불사의 석굴법당 전면이 현재의 모습과 달리, 목조가구의 와즙전실(瓦葺前室)이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진자료는 향후 석불사 정비와 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며, 석불사에서 출토한 고려 및 조선시대의 기와가 와즙전실의 목조 가구시설에 사용되었는지의 여부도 함께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의성 석불사는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 초에 제작된,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석굴법당에 안치되었고, 이와 관련된 고려 초기 및 중기의 기와가 이번 조사에서 확인됨으로써 초창시기가 고려 초기까지 소급되고 있음이 파악되었다. 그리고 석불사에서는 기와이외에 조선시대에 사찰의 공양구로 사용된 백자소문완과 도자기편이 출토하였고, 석조와 맷돌 및 돌절구 등 여러 생활용품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따라서 의성 석불사는 자연동굴을 이용한 일종의 석굴사원으로써 우리나라의 사원에 있어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하는데,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온 전통사찰로 그 법등이 오래 계속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