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억 -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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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억 - 기와
  • 이경일
  • 승인 2020.04.1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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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사원, 의성 석불사 출토 기와 3

연화문수막새는 완전한 형태로 1례가 수집되었는데 판육(瓣肉)으로 이루어진 세판계의 8엽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자방은 원형돌기로 대체되었고 주연부가 생략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일본기와임을 알 수 있다. 회흑색의 경질기와로 수막새의 지름은 13.0cm이고 두께는 1.7cm가량이다.

석불사 근대 연화문수막새(사진=김성구)
석불사 근대 연화문수막새(사진=김성구)

 

잔기와는 일본 에도시대부터 제작된 일본식기와로 수키와와 암키와, 수막새와 암막새가 하나로 제작된 일체형기와로 일제강점기에 일본가옥에 사용되었다. 무문의 수막새와 암막새가 하나로 제작된 잔기와는 약간 파손되었으나 일본식기와임을 알 수 있다. 회흑색의 경질기와로 수막새의 지름이 8.5cm이고 두께가 1.7cm가량이다.

석불사 근대 잔기와(사진=김성구)
석불사 근대 잔기와(사진=김성구)

 

착고는 1례가 수집되었는데 완전한 모습이다. 착고는 마루의 두 기왓등사이의 기왓골상단에 사용된 기와로 수키와의 양단을 알맞게 절단하여 제작하게 된다. 착고는 광복이후인 현대에 제작된 기와로 표면이 무문이고 이면에 포목흔적이 생략되었다.

석불사 현대 착고(사진=김성구)
석불사 현대 착고(사진=김성구)

 

의성 석불사에서 출토한 기와류는 암·수키와인 기본기와와 수막새 및 잔기와 등으로 구분된다. 기와는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와 중기, 조선 초기와 중·후기 및 근현대의 작례를 나타냈는데, 석불사의 초창과 그 연혁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하며 제작시기의 다양함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의성 석불사는 기와를 통하여 고려와 조선시대 및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법등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와는 표면에 새겨진 고판문양과 이면의 포목흔적 및 측면의 분할흔적에 따라 기와제작에 따른 각 시대의 시기와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의성 석불사는 우상문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기와를 통하여 고려 초기까지 초창시기가 소급될 수 있어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조선시대의 기와는 암·수키와가 많이 수집되었는데, 우상문과 복합문, 창해파문과 집선문 등이 새겨져 다양한 번와활동(燔瓦活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근현대의 기와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연화문수막새와 잔기와, 광복이후에 제작된 착고 등으로 구분되어 장기간에 걸쳐 법등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80년대에 찍은 석불사의 석굴법당 사진(사진 21)은 의성 석불사의 석굴법당 전면이 현재의 모습과 달리, 목조가구의 와즙전실(瓦葺前室)이 설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진자료는 향후 석불사 정비와 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며, 석불사에서 출토한 고려 및 조선시대의 기와가 와즙전실의 목조 가구시설에 사용되었는지의 여부도 함께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의성 석불사는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 초에 제작된,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이 석굴법당에 안치되었고, 이와 관련된 고려 초기 및 중기의 기와가 이번 조사에서 확인됨으로써 초창시기가 고려 초기까지 소급되고 있음이 파악되었다. 그리고 석불사에서는 기와이외에 조선시대에 사찰의 공양구로 사용된 백자소문완과 도자기편이 출토하였고, 석조와 맷돌 및 돌절구 등 여러 생활용품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따라서 의성 석불사는 자연동굴을 이용한 일종의 석굴사원으로써 우리나라의 사원에 있어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하는데,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온 전통사찰로 그 법등이 오래 계속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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