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이 인도한 사찰,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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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이 인도한 사찰, 용문사
  • 김민석 기자
  • 승인 2020.04.17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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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사 전경(사진=CPN문화재TV)
예천 용문사 전경(사진=CPN문화재TV)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에는 소백산의 끝자락에 걸친 것처럼 터를 잡은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선사(杜雲禪師)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절이다. 

 

예천 용문사에는 재밌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용문사의 창건자인 두운이 소백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했다는 것과 고려의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다가 이 사찰을 찾게 되었고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찾지 못할 때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고 한다. 이 두 설화의 내용에서 용이 나왔기 때문에 용문사라고 칭해진 것으로 전해진다.

 

용문사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輪藏臺)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관리중이다. 

 

용문사 대장전 윤장대(사진=CPN문화재TV)
용문사 대장전 윤장대(사진=CPN문화재TV)

 

이중 대장전에 설치된 윤장대는 내부에 경전을 넣어두는 일종의 경장인 목조경판고를 회전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쌓인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국보라서 보존이 중요시 되기 때문에 돌릴 수 없는 상태다.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에는 1173년(명종 3)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대장전과 윤장대를 건립하였다고 하였지만, 사적기(事蹟記)에는 1670년(현종 11)에 고쳐 수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윤장대는 1670년 쯤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윤문사의 윤장대는 당시의 불교 경장 건축의 원형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천 특징이 기록과 함께 잘 남아 있으며,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귀중한자료다.

 

충북 영동 영국사, 금강산 장안사 등에도 윤장대가 존재했었다는 흔적과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실물로 남아있는 윤장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용문사에만 남아 있는 것이며,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용문사의 주지인 청안스님은 이 윤장대에 대해 “국보는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국보는 국가의 상징인 만큼 국보에 걸맞게 주변 환경을 정리했으면 한다.” 고 밝혔다.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사진=CPN문화재TV)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사진=CPN문화재TV)

 

윤장대가 설치된 대장전에는 윤장대 외에도    보물 제989호인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醴泉 龍門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과 예천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醴泉 龍門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이 있다. 

 

대장전 안에 모셔진 삼존좌상과 그 뒤의 후불탱을 보고 있으면 그 경이로움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을 담은 삼존불의 모습과 그 뒤의 화려함을 갖춘 후불탱은 17세기 조선의 불교미술 기술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특히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탱화이면서 불상의 성격도 같이 지니는 재밌는 문화재다. 특히 평면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입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목각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1684년 소영당대사 신경이 총괄 책임하에 제작 되었다. 제작 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주존불상과 후불 목각탱이 함께 남아 있는 작품도 드문 점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

 

청안스님은 “이런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용문사에 대해 국가와 지자체가 자랑스러움을 느꼈으면 한다” 고 밝혔다.

 

취재팀 김민석 기자

kimminseok@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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