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茶 문화의 성지 ‘하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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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茶 문화의 성지 ‘하동’ 2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6.17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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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하동의 차 문화를 부활시킨 김복순 할머니
김복순 할머니가 하동 화개면에서 터를 잡고 처음 제다를 시작한 장소, 현재는 다른 가게가 있다 (사진 = CPN문화재TV)
김복순 할머니가 하동 화개면에서 터를 잡고 처음 제다를 시작한 장소, 현재는 다른 가게가 있다 (사진 = CPN문화재TV)

 

“김복순 할머니가 큰 역할을 하신 거죠. 하동의 덖음차를 크게 대중화 시키신 것으로는, 그 사실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겁니다” - 하동 덖음차보존회 회장 김원영-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죄송스러운 마음이에요. 진작 할머니의 공적을 기려서 기념관이나 비라도 세워서 기억했어야하는데.” - 하동 덖음차보존회 이사 정소암 -

 

하동은 1,200년의 역사를 가진 차의 고장답게 현재도 수많은 차와 관련된 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뜨거운 가마솥에서 손으로 덖어서 만들어내는 덖음차는 하동의 특산품으로 하동시에서도 관련 세미나와 공모전을 개최할 정도로 상징성이 높다. 

 

이러한 하동 덖음차의 대중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하동 덖음차 보존회를 이끌어가는 김원영 회장을 비롯한 하동의 사람들은 ‘두부집 할머니’ 또는 ‘김복순 할머니’라고 부르며 그를 기억하고 있다.

 

1930년대 당시의 김복순 할머니(우) (사진 = 조윤석 제공)
1930년대 당시의 김복순 할머니(우) (사진 = 조윤석 제공)

 

- 외동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생활, 해방 후 귀국하다

 

김복순 할머니는 1916년 경북 의령 김씨 문중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종종 약용으로 차를 덖는 모습을 봤고, 이는 훗날 덖음차 대중화의 뿌리가 된다. 

 

안타깝게도 세 가족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부모가 사망하고 재산은 모두 문중의 손에 들어간다. 홀로 남은 김복순 할머니는 수양딸로 부산에 보내지게 되고, 집안의 이동과 함께 17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 규슈 지방의 오이타 현에 정착하게 되는데 근처에 큰 차공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할머니는 차 공장에서 찻잎을 따는 일을 도우며 지식을 익히게 된다. 그러다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고 이에 할머니도 자연스럽게 귀국을 선택한다.

 

그는 부산에서 남편인 조태연씨를 만나고 판자촌에서 국밥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마음 한켠에는 차를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강하게 남아있었으나, 6.25전쟁으로 형편이 어려워서 생각으로만 남아 있었다.

 

휴전이 되고 1950년대 말, 한국 농학계의 대부인 우장춘 박사의 종포소(씨를 배포하는 곳)를 부산에서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우박사를 찾아가 한국의 차씨에 대해서 도움을 받고 본격적으로 차를 제조할 곳을 찾아서 수소문을 한다.

 

조태연씨는 전국을 돌아다닌 결과, 하동 화개면(화개장터)이 꾸준히 차를 만들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한다. 부산에서의 장사를 완전히 접고 5남매와 함께 하동에 정착하게 된다.

 

1962년 탄생한 '고려제다본포 선차'의 로고 (사진 = 조윤석 제공)
1962년 탄생한 '고려제다본포 선차'의 로고 (사진 = 조윤석 제공)

 

- 일본에서 차를 배웠으나 우리의 방법을 고수하다

 

김복순 할머니는 하동에 정착한 후, 두부집을 3년 동안 운영하면서 가장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해 몰두한다. 예전 아버지가 약을 만들기 위해 썼던 덖음 기법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활용해서 차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차에 대한 지식은 일본에서 습득했으나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나라 고유의 덖음 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차 제조 방식은 증기를 이용해서 찌는 ‘증차’ 방법이다. 이는 일본 토지 대부분이 화산토로 이루어진 탓에 독성을 날리기 위한 제조법이다. 이는 우리나라 차와는 맞지 않은 기법이었고, 좋은 성분이 다 날아가서 밍밍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수 년 간 한국 차에 맞는 가장 좋은 제조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연구했고, 덖음 방식과 함께 시야기(끝내기 작업)라는 다성 초의선사의 제조방법을 구현해 냈다. 마침내 1962년 한국 최초의 제다원인 ‘고려제다본포 선차’를 만들어 덖음차 제조를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후에 쌍계제다로 명칭을 변경하고 덖음차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현재는 ‘조태연가 죽로차’라는 이름으로 손자인 조윤석 씨에 의해 3대째 이어져오고 있다.

 


민가에서만 작게 이어져오던 하동의 덖음차를 대중화 시킨 것에는 김복순 할머니의 끊임없는 열정과 연구가 있었다. ‘두부집 할머니’로 불리며, 지금도 화개면에서는 할머니를 기억하고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덖음차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와 함께 김복순 할머니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재평가해야하지 않을까.

 


‘제3화 : 한 잔의 차가 나오기까지’로 이어집니다.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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