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혀지지 않은 친일파 경찰, 묻혀버린 악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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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지 않은 친일파 경찰, 묻혀버린 악행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6.23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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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사진 남아있지 않아, 사망한 연도도 불명
친일 인사로 체포됐던 노덕술(왼) (사진 = 독립기념관)
친일 인사로 체포됐던 노덕술(왼) (사진 = 독립기념관)

 

친일파 청산은 우리나라에게 남겨진 영원한 숙원과도 같다. 독립할 당시 제대로 된 해결을 보지 못했고, 반민특위가 갑작스럽게 해체되면서 그 악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반민특위는 1948년에 제헌 헌법 101조에 따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등장하면서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뿌리 깊게 남아있는 친일파 청산은 쉽지 않았고, 거기에 이념싸움까지 겹쳐지면서 1년 만에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파악된 사건은 알려진 것만 682건이었고, 재판까지 간 경우는 겨우 221건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처벌받도록 판결난 것은 40, 실제로 감옥까지 간 경우는 14건에 불과했다.

 

친일파들은 솜방망이보다도 약한 처벌에 더욱 활기를 띈다. 대표적으로 의열단 김원봉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괴롭히고 고문했던 고등계 형사 노덕술 역시 재판을 받았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선처로 풀려났고, 다시 경찰로 돌아가 범죄 수사대 대장을 하고 국회의원선거까지 출마하게 된다.

 

노덕술 외에도 같은 조선인을 악랄하게 탄압하고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경찰들은 많았다. 그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친일파 경찰 유승운의 행적을 돌아본다.

 

- 종로경찰서에 고등계 경찰을 만들어낸 유승운

 

유승운은 1900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했으며, 1921년 순사로 경찰계에 입문한다. 1925년 종로경찰서 순사부장으로 승진했으며, 1928년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되었으며, 1930년부터는 경기도경찰부 고등과에서 순사부장으로 활약하는 등 자발적으로 친일에 앞장섰다.

 

특히 조선총독부에 직접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는 움직임이 거세니 형사 고등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전달해 종로경찰서에 고등계를 만들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진 원흉으로도 꼽힌다.

 

그가 작성한 심문조서는 수백 건에 이르며, 일부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에서 마이크로필름자료로 볼 수 있다. 심문조서의 내용은 치안법위반에 대한 것과 집회단속 상황복고가 대부분이다.

 

1923년 5월에 작성된 종로경찰서의 '집회 단속상황 보고서', 오른쪽 아래 부장 이름으로 유승운의 이름이 보인다 (사진 = 독립기념관)
1923년 5월에 작성된 종로경찰서의 '집회 단속상황 보고서', 오른쪽 아래 부장 이름으로 유승운의 이름이 보인다 (사진 = 독립기념관)

 

- 신민부 군자금 사건 등 수많은 독립운동 탄압

 

주도적으로 조사한 사건 중 대표적인 사건이 1928년 신민부 군자금 사건이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한 신민부의 밀사를 체포한 뒤 대한광복회 등 연계 단체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을 대구에서 검거했다.

 

1929년 공명단 군자금 사건에서도 경기도 양주군에서 일제 우편차량 습격한 공명단원 최양옥을 직접 체포했다. 6·10 만세운동 때는 배후에 있던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을 심문하여 이 시위가 일제의 시각에서는 불온한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1930년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에서는 탄압을 피해 망명했다가 다시 국내로 잠입해온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 한빈 등 4인을 체포했고,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노동운동가 정칠성도 유승운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또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사 방법으로도 유명했다.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는 혐의로 잡혀온 최기윤이 유승운에게 취조와 회유를 받고 허위자백을 한 예가 있으며, 1928년 신민부의 밀사가 군자금을 모금하러 잠입한 사건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신현규는 옥중에서 뇌진탕으로 변사하여 고문 의혹을 강하게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무자비한 악행들을 통해 일제로부터 시국사건 탐지와 해결에 보인 능력을 인정받아 '우수민완형사'로 지정되었다. 1934년 만주사변 반대공작사건 관련자를 검거한 공으로 만주사변 공로기장이 상신됐다.

 

 

그의 무자비함은 1935년 폐결핵으로 은퇴를 선언하기까지 계속된다. 그 후에 대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사망연대도 불명확하다. 당대 의료상황을 생각하면 폐결핵이 꽤 무서운 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오래 살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가 행한 악행에 비하면 명확하지 않은 기록이 아쉽게 느껴진다.

 

유승운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중 경찰부분에 포함 되었으며,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어 있다. 친일 명단에 포함되어있는 사람이지만, 그에 대한 악행 기록과 사진, 최후에 대한 기록이 잘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은 제대로 된 친일청산에 실패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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