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매주(撤院埋主)의 현장이 최초로 확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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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매주(撤院埋主)의 현장이 최초로 확인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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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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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의 관산서원은 영남5현(嶺南五賢)의 한 명인 문목공 (文穆公) 정구(鄭逑, 1543~1620년)를 기려 1620년 (광해군 12년)에 세운 서원이다. 정구가 창녕현감 시절 관산재(冠山齋)를 비롯한 8개의 서당인 세우는 등 선정을 펼쳤고, 그의 사망 당해에 바로 관산재 아래에 관산서원이 세워졌다. 그러나 관산서원은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패령에 의해 철패 되었고, 신주(神主)는 땅에 묻히게 되었다.





▲ 관산서원에서 발견된 매주시설

조선 후기, 서원은 건물건립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과 제사지내는 데 필요한 경비를 지방관이나 지방 유지에게서 거의 강제로 받아냈다. 1862년(철종 13년)에는 충북 괴산의 화양동 서원 유생들이 사원(祠院)을 수리, 개축하는 데 필요한 재물을 모은다며 전라도까지 가서 행패를 부려 물의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화양동 서원에 가서 만동묘 제(祭)의 광경을 참관하던 중, 무심코 정면 계단을 올라갔다가 유생들에게 불경(不敬)스러운 짓을 했다며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1864년(고종 1년)에 민폐를 이유로 사원에 대한 조사와 그 존폐여부의 처리를 조정논의에 맡겼다. 1868년과 1870년에는 미사액서원과 사액서원으로 구분하고 제사지내는 일이 제향자의 후손에 의하여 주도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은 없앨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1871년(고종 8년)에는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1인 1원(一人一院) 이외의 모든 서원을 일시에 철거케 하여, 전국에 47개소의 사원만 남게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의 서원 중 11개소는 북한에 소재하고 있고, 강원도 김화의 충렬서원과 철원의 포충사 2개소는 6.25전쟁에 소실되었다.





▲ 위패가 안치된 옹기 모습

이번 관산서원터의 매주(埋主)시설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철폐시킨 사당터 자리 한가운데를 파고 옹관처럼 옹기를 맞붙여 세워 그 속에 신주, 곧 정구의 위패를 봉안하고는 그 둘레에 사당에 얹은 기와로 3겹이나 감싸고 단단하게 흙으로 덮은 특이한 형식이다. 겹겹이 둘러싼 기와 사이에는 습기제거나 벽사용으로 보이는 숯덩이가 포함되어 있다. 옹기 속에는 옻칠이 된 목제 위패 1점이 모셔져 있음이 비디오 내시경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지금까지 서원철폐와 관련된 실증적인 유물자료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창녕 관산서원 터에서 발견된 매주시설과 형식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첫 사례로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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