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서예작품 보물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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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서예작품 보물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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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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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2009년 동종(同種)문화재 일괄공모사업’을 통해 전국에 소재한 서예작품 중 ‘조선전기의 명필’ 및 ‘어필’을 발굴하여 그 중 20건 40점에 대해 보물로 지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지난 10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 회의를 통해 최종적으로 보물로 선정된 20건은 조선전기의 명필이 9건, 어필이 11건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622호로 지정된 ‘서거정·기순 필적’은 1476년(성종7)에 제작된 것으로 이 해 1월말에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사신 호부낭중 기순과 사신일행을 맞이했던 원접사 서거정의 글씨가 함께 실려 있다. 표지에는 ‘천사사한진적(天使詞翰眞蹟)’ 이라 쓰여 있다. 조선 초기의 서예유물은 매우 희귀한데, 이것은 15세기 조선의 문인명필 서거정의 대표적인 필적일 뿐만 아니라 명나라 사신의 필적이 함께 실려 있어 양국의 교류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필적이다. 각 글씨 끝에는 연월일과 관직, 인명, 자호가 기록되어 있고 전래과정을 알려주는 영조 12년의 발문은 작품의 가치를 한층 높여 주고 있다.

제 1623호로 지정된 ‘성수침 필적’은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학자 청송 성수침이 당나라 가도, 두목, 이상은과 송나라 구양수의 칠언시를 쓴 것이다. 표지에 ‘청송서(聽松書)’라고 쓰여있다. 성수침은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 명필로 필적은 드문 편이다. 현재 그의 소자(小字)는 몇몇 전하고 있는 상황이고 대자(大字)는 목판밖에 전하지 않는다. 이처럼 큰 글자로 쓴 작품이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문 예이며 담묵을 즐겼던 그의 특징이 또한 잘 나타나 있다. 서예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제 548-2호로 지정된 ‘이황 필적 - 선조유묵첩’은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모두 18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서첩은 퇴계 이황이 자손에게 보낸 서한을 비롯하여 자신의 시문 원고, 타인의 저작을 베낀 것, 당송의 시를 서예적으로 쓴 것 등 젊어서부터 노년에 이르는 여러 필적을 모은 것이다. 표지 숫자가 “卄三”까지 되어 있어 원래 23첩 이상이었으나 현재 제2, 7, 10, 21, 22첩은 없고 18첩만 전한다. ‘선조유묵’은 그 동안의 이황의 필적 중 가장 다양한 필적을 보이고 있고 내용이 교훈적이며 서예작품으로 뛰어난 예가 많아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





▲ 양사언 초서


제 1624호로 지정된 ‘양사언 초서’는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문신ㆍ시조작가ㆍ초서명필로 유명한 봉래 양사언이 당나라 저광의의 오언시 ‘낙양도’ 5수 가운데 제1수를 쓴 것이다. 원래 첩이었던 것을 근대에 축으로 개장하였다. 이 필적은 둥근 원필세의 빠르고 거침없는 대자초서(大字草書)로 자유분방하고 도가적 기풍의 예술세계를 가졌던 양사언의 성품과 그가 지향한 초서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초성(草聖)이라 불렸던 그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명작으로 평가되며, 더욱이 뒤쪽에 조선후기 명필 이광사의 1749년 발문(3건)과 조명교의 발문이 딸려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제 1625-1호로 지정된 ‘황기로 초서 - 이군옥시’는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명필 고산 황기로가 당나라 이군옥의 오언율시를 쓴 것이다. 그는 회소의 방일한 초서를 애호하고 또 회소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동해옹 장필(1425~1487)을 따랐다. 이 초서는 회소와 장필을 배워 활달하고 운동세가 많은 획법과 짜임의 변화를 잘 구사한 예이다. 하단 부분에 몇 글자 탈락되었으나 황기로의 묵적 가운데 대폭(大幅)이며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제 1625-2호로 지정된 ‘황기로 초서 - 차운시’는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황기로가 다른 사람의 시를 차운하여 짓고 쓴 초서이다. 이 필적은 지금의 소장자가 입수할 때 가로로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액자로 개장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도 글씨가 손상되지 않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것은 규모는 작지만 필획이 매우 간정(簡淨)하고 운필이 활달하여 황기로 글씨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뛰어난 수작이다.

제 1626호로 지정된 ‘김현성 필적’은 1614년(광해군6)에 제작된 것으로 남창 김현성이 북애 이증(1525~1600)의 절구와 율시 9편을 행서로 필사한 것이다. 김현성은 조선전기부터 유행하던 송설체(松雪體)의 명가인데, 특히 성수침 등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유려한 서풍으로 명성을 얻었다. 63세의 노숙한 필치라는 점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바탕을 잘라 장황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며, 특히 말미의 제사를 통해 필사동기와 연대를 알 수 있어 더욱 가치가 있다.

제 1078-2호로 지정된 ‘한호 필적 - 석봉진적첩’은 1602년(선조35), 1604년(선조37)에 제작된 것으로 선조연간의 명필 석봉 한호가 쓴 노년필적을 모은 것이다. 모두 3첩 1질로 되어 있다. 서첩을 쌓은 질에는 ‘포졸당’, ‘김광국장’, ‘원빈씨’라는 인영이 있어 18세기의 유명한 서화수장가 석농 김광국이 수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필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한호의 필적 가운데 단연 최고로서 다양한 서체로 쓰였고, 말년의 원숙한 서풍을 보이며, 김광국이라는 서화수장가의 안목을 거쳤다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제1078-3호로 지정된 ‘한호 필적 - 석봉한호해서첩’은 16세기말에서 1605년에 제작된 것으로 한호가 절친했던 간이당 최립의 시문 21편을 단정한 해서로 필사한 것이다. 상·하 2첩으로 되어 있으며 하첩 뒤쪽에는 이백의 오언시 한 수를 초서로 쓴 필적이 더 있다. 이것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필사한 양도 많으며, 하첩 말미에 18세기의 초서명필 만향재 엄한붕의 아들 엄계응이 쓴 1803년 9월의 발문이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제 1627호로 지정된 ‘인목왕후어필 칠언시’는 1623년(인조1)경에 제작된 것으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이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각행 7자)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되었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의 1966년 발문이 있다. 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이러한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제 1628호로 지정된 ‘효종어필 칠언시’는 효종 제위시기(1649~1659)에 제작된 것으로 효종이 ‘제어옥후소천’이란 어제칠언시를 종이바탕에 행초(行草)로 쓴 것이다. 이 필적은 묵적으로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크며 또 행초를 섞어 자신감 있게 쓴 점에서 효종어필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제 1629-1호로 지정된 ‘신한첩 - 신한첩1’은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효종, 현종, 인조계비 장렬왕후, 효종비 인선왕후가 효종의 셋째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어찰을 모은 첩이다. 이 어찰첩은 한글서체 변천과정에서 고체에서 궁체로 가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대표적인 필적이 다수 수록되어있어 관련분야 연구 자료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제 1629-2호로 지정된 ‘신한첩 - 신한첩2’는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효종, 현종, 숙종, 효종비 인선왕후, 현종비 명성왕후, 숙종비 인현왕후가 효종의 넷째딸 숙휘공주에게 보낸 한글어찰을 모은 것이다. 이 어찰첩은 현종, 명성왕후, 숙종의 한글어찰을 수록한 ‘어필첩(御筆帖)’등과 함께 조선왕실의 한글어찰을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제 1630호로 지정된 ‘숙종어필 칠언시’는 숙종 제위시기(1674~1720)에 제작된 것으로 숙종이 인조 때의 명상(名相)이던 이경석의 문집 ‘백헌집’을 살펴본 뒤 이경석 후손에게 내려준 어제어필의 칠언시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묵적의 숙종어필 가운데 가장 신빙할 만한 예로서 채색꽃무늬를 찍은 어찰지를 사용한 이 어제어필은 열성어제(列聖御製)인 ‘숙종어제’에도 실려 있어 어필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제 1631-1호로 지정된 ‘영조어필 -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는 1726년(영조2)에 제작된 것으로 영조가 친어머니 숙빈최씨의 생신을 맞아 숙빈묘에 올렸던 제문의 원고이다. 조선의 어필은 전반적으로 희귀한 편인데 영조는 역대 국왕 중 어필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에 속한다. 그 가운데 이 원고는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낱장이 아닌 왕실의례용 공첩에 직접 쓴 희귀한 예이다.

제 1631-2호로 지정된 ‘영조어필 - 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는 1744(영조20)년에 제작된 것으로 사친 숙빈최씨의 소령묘의 묘갈문을 짓기 위해 쓴 초안 원고이다. 이 원고는 영조가 즉위한 뒤 사친에 대한 추숭사업의 과정에서 남긴 필적의 하나로서 영조의 까다로운 성격이 그대로 연상되는 영조 노년의 독특한 어필서풍을 보여준다. 이것은 장서각에 소장된 여러 영조어제어필 시문원고 가운데 ‘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와 더불어 의미 깊은 필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 1631-3호로 지정된 ‘영조어필 - 읍궁진장첩’은 영조 재위후년(1761~1776)에 제작된 것으로 영조의 여러 어제어필을 모은 것이다. 이 어필첩은 영조어필을 모은 몇몇 서첩 가운데 수록 필적이 정선되고, 영조 노년인 1761년, 1765년, 1770년의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조선후기 궁중장황으로 꾸며지고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어필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된다.





▲ 정조어필-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


제 1632 - 1호로 지정된 ‘정조어필(正祖御筆) - 신제학정민시출안호남‘은 1791년(정조 15)에 제작된 것으로 정조가 호남으로 부임하는 정와 정민시를 위해 지어 써준 행서 칠언율시이다. 이 서축은 경남 사천 출신의 재일교포사업가 김용두(金龍斗)씨가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일본식으로 장황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문상정사’와 함께 정민시에게 내려준 것으로 이런 형식의 정조어필 가운데 서예적 기량이 가장 높은 40세 기년작(記年作)이다.

제 1632-2호로 지정된 ‘정조어필 - 제문상정사’는 1798년(정조22)에 제작된 것으로 정조가 정와 정민시의 문상정사(汶上精舍)에 대하여 지은 어제어필 칠언시이다. 현존하는 정조어필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며 보존상태도 매우 좋다. 또한 연청색과 상아색 비단으로 꾸민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궁중표장(宮中表裝)을 보여주고 있다. 서체 역시 이전에 쓴 글씨보다 더욱 두터운 필치에 파임이나 갈고리부분에서 안진경의 유풍이 두드러져있다. 만년의 대표작으로 예술성이 뛰어나 정조어필의 최고작으로 평가된다.

제 1632-3호로 지정된 ‘정조어필 - 시국제입장제생’은 1798년에 제작된 것으로 성균관에서의 국제(菊製)에서 정조가 낸 어제의 뜻을 유생들이 이해하지 못해 백지와 거친 답안이 나오자, 정조가 여러 유생에게 내보였던 초고의 별유(別諭)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임금이 성균관 유생에게 내린 별유로서 보기 드문 예이며, 정조 말년의 다른 어필에 비해 필치가 활달하며 서폭도 매우 크다. 또한 정조의 모훈(謨訓) 자료로 봉모당에 전래되어 온 점에서도 귀중한 필적으로 평가된다. 더구나 당시 행사의 면모와 제왕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어 역사적ㆍ학술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가치가 인정된다.

‘동종문화재 일괄공모사업’은 신청 위주의 소극적 문화재 지정 관행에서 탈피하여 지정에서 소외된 문화재를 직접 공모하고 발굴한다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업의 결과 2005년부터 현재까지 93건의 보물을 지정하는 성과를 올렸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선정된 문화재에 대해서 내용과 함께 상세 사진을 수록한 보고서 ‘한국의 옛글씨(가제)’를 곧 발간할 예정이며, 오는 2010년에는 조선 후기의 명필을 대상으로 일괄공모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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