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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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산책로
  • 관리자
  • 승인 2010.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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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점점 높아져 혹여 라도 자신을 잊을까 땅위에 사는 것들은 제각기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며 하늘을 유혹하려 들고, 그 덕에 인간은 눈이 즐거워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 우리 고궁의 가을


가을. 참으로 인간을 황홀하게 만드는 계절에 선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 단풍구경을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단풍구경”하면 “산”이 떠오르니 막막하기만 했다. 산을 싫어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좋아라 하지 않기에 단풍구경을 위해 산을 굳이 찾는 다는 건, 그것도 직장생활 중인 나에겐 무리였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나들이겸 산을 오르는 것도 건강상 참 좋은 움직임이기는 하나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가끔 나를 주춤 거리게 할 때도 있다. 이거도 어찌 보면 움직이기 참으로 귀찮아하는 나의 변명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하더라도 나와 같이 단풍구경을 원하나 산을 오르길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뻗어져 나온 단풍구경의 명소가 바로 고궁이었다.






▲ 창덕궁 비원의 가을


이전부터 자연과 함께 건축을 하길 좋아했던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면, 단풍 구경을 하기에 가장 적격인 장소라 생각한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고, 그 속에 자연이 멋스러움을 더하니 고궁만큼 우리의 가을을 어여쁘게 빛내줄 장소가 있겠는가. 전국 각지에 아름다운 단풍을 뽐내는 고궁 중 내가 선택한 곳은 창덕궁 비원이다.






▲ 한권의 책,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정자들


유달리 왕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창덕궁 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정원을 꾸민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각 연못마다 세워놓은 아담한 규모의 정자들은 자연을 더 아름답게 꾸며줄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우리에게 최고의 그림을 선사하기도 한다. 바로 이 정자들에서 자그마한 서적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실지로 궁궐 후원은 임금들이 자연을 감상하고 시를 짓기도 하며, 책도 읽었던 심신단련의 장소였기에 이번에 주최하는 행사는 그 어느 행사보다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게다가 창덕궁의 절경들은 골짜기마다 숨겨져 있어 일부러 골짜기의 연못과 정자를 찾아다녀야 하는데, 그곳에 독서의 장을 마련해 놓았으니 자연도 즐기고 책도 읽는 1석2조의 이벤트가 아닌가 싶다. 더불어 가이드와 함께 시간제 관람 밖에 되지 않는 후원이 이번 행사를 위해 자유 관람도 시행하고 있으니 많은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만했다.






▲ 텅빈 정자 안


하지만, 각 정자에 앉아 있는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가 사람들로 하여금 한 자리에 앉아 낭만을 즐기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정자가 한옥이라면 온돌이라도 될 텐데 정자다 보니 그러지도 못해 정자마다 방석이 비치되어 있어도 앉아 있을 따뜻함을 선사하지 못하니 굳이 정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없었고, 앉아 있다 하더라도 얼마 가지 못해 그대로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책을 가지고 비원을 거닐다 읽으며, 관계자 누구에게라도 책을 반납하거나 각 정자에 책꽂이에 꽂아 놓아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아직까진 첫 시작이라 책을 들고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얇은 책을 비치해 놓음으로써 관람객으로 하여금 책을 읽다 말고 돌아가는 당황스러움을 만들지 않으려 한 것 같아 관계자들이 이번 행사에 얼마나 세세한 신경까지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 정자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비치해 놓았습니다. 언제든 책을 들고 읽으면서 자유롭게 관람 하셔도 됩니다만, 오늘은 권하지 않겠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 앉아 책을 볼 여유가 안 생기네요.”


관람 중 많은 가이드들이 관람객들에게 이번 행사를 소개하면서도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의도하지 않게 추워진 날씨 때문일 것이다. 하다못해 도서를 관리하고 있는 관계자도,


“따뜻한 날씨면 많은 사람들이 정자가 시원해 많이 이용했을 것 같은데, 날씨가 추우니 정자가 시원한 것이 아니라 춥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지 않는 것 같아요.”


라며 걱정 어린 말을 남겼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아쉬워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아직 행사 초반이고, 창덕궁의 단풍 절정기는 11월이지 않는가. 다만, 행사가 11월 7일부로 막을 내린다는 게 더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이번 행사의 호응도를 보고 앞으로 이런 자리를 계속 마련할지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니, 부디 이번 가을에는 존덕정에 둘러 앉아 금빛연못(낙엽이 연못에 떨어져 모두 덮는 바람에 금빛 낙엽 색깔로 연못이 물이 든다고 한다)을 친구삼아 책을 읽는 우리시대 왕손들이 많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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