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문화인물, 효명세자
상태바
11월의 문화인물, 효명세자
  • 관리자
  • 승인 2005.11.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관광부는 순조의 세자이며 궁중 정재(呈才: 궁중 잔치에서 하던 노래와 춤)를 예제(睿製: 왕세자나 왕세손이 지은 글)한 '효명 세자(孝明世子, 1809~1830년)를 11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했다. 궁중 무용의 창사(唱詞: 궁중 잔치 때의 노래 가사)를 직접 짓고 전체 레퍼토리를 선정·기획해 선조 말까지 전해지는 53종의 궁중 정재 가운데 26종을 재창작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효명세자는 역대 국왕 중에 가장 예술적 문학적 조예가 깊고 뛰어났으며 무엇보다도 춤을 사랑한 왕이었다. 조선 제 23대 왕인 순조(純祖) 9년 8월 9일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의 제 1자로 태어나 순조 12년(1812) 4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순조 27년 2월 18일부터 30년 5월 6일 급서하기 전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대리 청정을 했다.



당시 안동 김씨 세도 정치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순조의 염원과 기대를 한 몸에 지고 부왕의 명을 받들어 대리 청정을 하였으며 대청 동안에 아버지 순조의 정치적 염원을 거의 가시화하는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증명해보였다. 효명세자는 정조의 우문(右文)정치와 위민(爲民)정치를 계승코자 하였으며, 정책적으로는 청의를 표방하고 엄정의리론을 펼쳐 백성을 위한 정치로 대리 청정 말기에는 거의 민심을 수습하였다.



대리 청정 동안에 그는 예악 정치의 일환으로 궁중 연향과 춤을 다루는 고도의 무용정치를 펼쳐 효율적으로 안동 김씨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는 장치로 활용하였다. 당시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악정(樂政)이 중단되어 정재의 창사조차 제대로 전해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궁중 연향을 개최하면서 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 질서를 과시하고 왕실의 위엄과 존왕 의식을 표명하는 정치 의식으로 양식화했다. 3년의 짧은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례 없이 화려한 황제식 궁중 연향들을 벌이면서 궁중 무용의 창사와 가사를 직접 짓고 연향에 쓰이는 치사와 전문을 직접 지어 올리고 이름만 남은 옛 정재들을 자신의 악장으로 되살려내고 연향의 규모를 확대해 왕실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는 화려한 정재와 연향의 양식을 확립 했다. 효명세자에 의해 새롭게 정립된 조선 후기 궁중 연향과 정재 양식은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 순조기축진찬도 (純祖己丑進饌圖)
:1829년 2월 순조의 사순(四旬)과 즉위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창경궁에서
거행된 '진찬' 이라는 궁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병풍.



효명세자가 정재 창작과 궁중 연향에 대해 보였던 각별한 관심과 참여는 궁중 의식과 춤을 왕권 강화를 위한 고도의 정치적 수단으로 다루기 위함이었다. 대청을 시작한지 삼일 만에 자신의 하례식의 절차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안동 김문 계열의 전·현직 예조판서들을 감봉 처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대리 청정 말기에 이르러서는 안동 김씨 세력을 정치적으로 거의 제거하고 자신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었다.



효명세자는 연향에 쓰일 정재들을 창작하면서 이름만 전해오던 춤들을 모두 자신의 신작(新作)으로 되살려 냈다. 전대로부터 전승되어오던 정재들도 다시금 화려하게 채색하고 무원의 수를 늘려 웅장하고 화려한 대규모의 연희에 적합한 정재의 성격을 만들었다.



또한, 중국에서 유래한 당악 정재를 향악화하고 당악 정재(唐樂呈才)와 향악 정재(鄕樂呈才)간에 있었던 형식적 그리고 내용적인 차이를 불식시켰다. 이는 단지 중국에서 유래한 당악적 요소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춤이 중심이 되는 향악 정재의 예술적 장점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진 결과라 생각된다.



조선 정재의 절정기를 이룬 효명세자는 조선조 초기 정재를 왕권 창업의 정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