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3월의 독립운동가 '동오 신홍식'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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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3월의 독립운동가 '동오 신홍식'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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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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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관장 金三雄)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하신 동오(東吾) 신홍식(申洪植) 선생을 2006년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신홍식 선생은 1872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에서 아버지 신기우(申驥雨)와 어머니 최살랍(崔撒拉)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는 뚜렷한 직업 없이 과거시험에 전념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불우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선생은 1904년경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 활동을 시작했고, 이것이 선생의 일생에 큰 변화의 계기가 됐다.







▶ 3월의 독립운동가 '동오 신홍식' 선생



1906년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 직산교회 전도사로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한 선생은 1910년에 감리교 계통의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했다.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하는 등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1913년 집사목사를 안수 받은 후 공주지방 순회목사로 부임했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로 파견됐다. 평양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적인 기독교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선생은 마음속으로 품어왔던 참담한 민족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민족운동가로 변신을 꾀한 것이다.



1919년 2월 중순 경 손정도 목사의 권유로 이승훈 선생을 만나 3·1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서울 모임에서 평안남도 지역의 동지 모집 역할을 담당한 선생은 평양 지역의 목회자들인 아펜젤러기념교회 김찬홍 목사, 이문리교회 주기원 목사, 신양리교회 김홍식 목사와 접촉해 평양 지역의 시위를 주도적으로 전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역사적 날인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석해 3·1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이 때문에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2년의 수감 생활을 했다. 재판과정에서 일제의 강제 병탄 반대와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어 일제의 판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의
신홍식 선생 무덤(왼쪽)과 묘비(오른쪽)








▶ 1922년 3월 11일, 신홍식 선생의 강연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21년 11월 4일에 만기 출옥하고, 이듬해에 인천내리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활동을 재개했다. 1922년에는 '인천내리교회사'를 서술했고, 1925년 창립된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흥업(興業)'은 표면적으로는 산업을 일으킨다는 취지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단체였다. 

1930년대에는 흥업구락부 회원 일부와 '기독신보'계열의 개혁적 인물들과 결합해 '적극신앙단'을 결성하고 적극신앙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신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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