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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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엄항섭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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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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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엄항섭(嚴恒燮) 선생을 2006년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다고 지난 31일 밝혔다.



엄항섭 선생은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지내며 임시정부의 활동과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알리는 선전활동에 힘쓴 인물이다.














▶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있는 '엄항섭
선생의 묘'
비석에 새겨져 있는 생년월일은
양력이다.


1898년 음력 9월 1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엄항섭 선생은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 재학 중에 3·1운동을 경험하고, 곧바로 중국 상해로 망명해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엄항섭 선생이 임시정부에 몸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이에 선생은 불란서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해 자신이 받은 월급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한편,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하자 김구 선생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임시정부의 활동과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알리는 선전활동에 힘썼다. 1940년 5월 8일에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3당을 통합, 새로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 주석판공실 비서, 그리고 1944년 좌우합작 정부에서는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미주동포들의 재정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한편, 엄항섭 선생의 부인 연미당(延薇堂, 1908~1981) 여사 또한 독립운동가이다. 연미당 여사는 연미당 중국 장사에 있는 남목청(楠木廳)에서 3당 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운한(李雲漢)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김구(金九) 선생을 간호했으며, 1938년 10월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1943년 2월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어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며 활동했다.














▶ 항주에서 임시정부 용인들 모습
(왼쪽부터)
김구·진동생(중국인)·이동녕·엄항섭




광복 이후 엄항섭 선생은 1949년 4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1950년 9월에 납북됐다. 북한에서도 선생은 통일을 위해 진력하다가 1962년 7월 30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1989년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



독립기념관에서는 4월 한달 동안 엄항섭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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