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4중 사리장엄구' 나왔다
상태바
백제 '4중 사리장엄구' 나왔다
  • 관리자
  • 승인 2007.10.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인물도






오늘 4월 6







 



 







▶ 왕흥사지서 출토된 백제 금ㆍ은ㆍ동 사리기







 







백제시대 왕흥사지의 목탑지에서 돌-동-은-금의 4중으로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완벽한 상태로
최초 발굴되었다. 학계는 “백제 금동대향로 이래 최대의 발굴성과”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부여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에 대한 발굴조사 자문위원회 및 현장학습의 날 행사를 실시하고
발굴조사의 성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의 중요한 성과는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완벽하게 봉안된 사리장엄구가 최초로 확인되었다는 것과 더불어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기록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사리기의 봉안수법과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되었고, 사리구를 포함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의 다량의 진단구가 출토되어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리함은 장방형 심초석(건물을 받쳐주는 중심 기둥의 주춧돌) 남쪽 끝단에 마련된 사리공(사리함을 넣기 위한 공간) 내부에 화강암
뚜껑에 덮여 봉안 되어 있었다. 청동재질로 된 원통형 사리함 안에 은으로 된 사리병(외병)을 봉안하였고, 또다시 그 안에 금으로
만든 사리병(내병)을 봉안하여 만들었으며, 안에 사리는 들어있지 않았다.







 








 



 







▶ 사리함의 명문 기록







 







청동 사리함에는 5자6행의 음각체로 다음과 같은 명문이 적혀있다.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정유년 2월 십오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이 명문을 통해 삼국사기에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되었다고 기록되어있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597년(위덕왕44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된 아좌(阿佐)태자 이외에
위덕왕에게 또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명문 및 사리구의 구성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같은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567년)
보다 10년 뒤에 조성되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짐으로써 백제사 편년과 동시기 고고학적 자료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ㆍ사회ㆍ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cpn문화유산 문화재TV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