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은 일컬어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하고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한다.” 라고 차를 찬양했다.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다산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정약용, 다산의 호는 원래 다산이 아니었다.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눈썹이 세 개라 하여 삼미자(三眉子)라 하였고, 유배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철마산인(鐵馬山人), 성격의 약점을 치료하려 여유당(與猶堂) 등 생전 호가 12개나 되었다.
그의 독특한 호를 하나 꼽으라면 바로 스스로 지어 부른 “다산”이라는 호이다. 황서영 백서 사건(辛酉史獄)에 연류되어 경상도 풍기로 유배를 떠난 지 1년 만에 다시 불려나온 다산은 훗날 흑산도로 유배를 가서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과 함께 재차 유배를 떠난다.
다른 형제들은 모조리 참수형에 처해진 다음이었다. 실상은 경주 김씨 가문의 서인 세력들이 정조 사후 남인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려고 일으킨 옥사가 바로 신유년에 일어난 황서영(황서영은 다산의 조카사위였다.) 백서 사건이었다.
도합 4형제였던 다산의 형제들은 둘만 남기고 모조리 참수 당한다. 체제공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다산과 그의 형 정약전은 당시 율정(栗井)이라는 곳에서 서로 길 갈림을 한다.
율정은 지금의 나주이다.(나주가 배가 유명한 고장이 된 것은 일본 놈들이 배를 수탈하기 위해 밤나무를 베어버리고 배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한 명은 흑산도로 한 명은 강진으로, 그 마지막 날 잠을 자면서 둘의 심정은 어이했을꼬.
형제들은 모조리 참수당하고, 가족들은 노비로 팔려 나갔으며, 옥당 가문이었던 집안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으며, 자신들마저 유배 길에 올라 기약 없는 길을 떠나고 있으니, 당금 심정은 참담 그 지경 이상이었으리라.
어쨌든 둘은 그렇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 길을 떠난다. 가는 동안 내내 얼마나 형을 그리워하고 섬으로 떠나는 형의 안부를 물었을까? 아직도 강진 다산 초당 뒤편에는 다산이 흑산도의 형을 그리워하면서 하염없이 구강포 앞바다 저 먼 곳을 바라보았던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그때까지도 다산은 자신이 차와 어떤 관계를 지을지 몰랐다. 처음에는 사의제(사의제)라는 주막집에 거처를 만들었다. 1801년 11월23일이었다. 이곳에서 다산은 4년간 기거를 한다. 당시 오갈 데 없는 다산 선생의 딱한 사정을 알고 동문 매반가의 주모 (할머니)가 골방하나를 내어준 것이다.
다산선생은 이곳에 네 가지 생각, 생각. 용모 .언어. 행동을 올바르게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의제 (四宜濟)라는 당호를 걸고 6명의 제자를 훈육한다. 그러던 중 조정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귀한 사람이 유배를 왔다는 말을 듣고 아암, 혜장선사가 다산을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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