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무의 태어남(차나무의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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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무의 태어남(차나무의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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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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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와 초의, 신의를 바탕으로 맺은 금란지교(金蘭之交)


(차나무의 생성)



后皇嘉樹配橘德(후황가수배귤덕) 受命不遷生南國(수명불천생남국)

密葉鬪霰貫冬靑(밀엽투산관동청) 素花濯霜發秋榮(소화탁상발추영)








▲ 동다송


상기문장은

자연은 아름다움과 이로운 성품의 나무를 인연으로 맺어주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남극의 자리를 버리지 않으리라.

고요한 잎은 겨울의 눈발에도 떨어지지 않아 늘 푸르고

서리로 씻어내 생명이 다하나 했더니 가을에도 그 영화로움을 잃지 않으리라



后皇嘉樹配橘德


보통은 후황(后皇)이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창함과 화려함의 통상적 영역인 황후(皇后)라 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단순해질 수도 있는 이 부분에서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후를 미리 대입하면서 초의 스님은 동다송을 시작하지 않는가. 后皇(후황) - 첫머리의 후(后)는 ‘토지를 관장하는 신’을 말한다. 토지란 자연의 이치로 보았을 때 여성에 해당된다. 토지는 곡식을 품고, 풀을 자라나게 하며, 생육의 터전을 제공하니 음(女性)을 말하며, 음(女性)의 번성함은 곧 풍요를 상징한다. 제아무리 밭에 좋은 종자를 뿌려대도 밭이 후덕하지 못하고 자연의 이치를 모르면 곧 생장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자연의 무궁한 지혜의 시작인 것이다. 바로 태어남 혹은 출발인 것이다. 차나무의 출발, 초의선사는 동다송의 처음을 태어남, 혹은 태초, 혹은 옹알이 하는 듯한 무변으로 시작한다. 태어남의 이치는 여성으로부터 그 주권이 행해기에 후를 강조한 것이다. 정자수가 난자수의 엄청난 숫적 우의에 달하지 않는가. 단 하나의 택일은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생명의 근원에는 다양한 객체에서 우성성이 강조되는 단 하나의 양성만이 필요한 법이다. 태어남부터 그 엄청난 시련, 혹은 경쟁, 혹은 다툼이 존재한다. 이미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완전한, 이 세상의 모든 태어남의 조건에는 여성이 그 첫째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자연의 탄생엔 힘도, 권위도, 그 무엇도 아닌 부드러움과, 안온함과, 그리고 그에 못지않을 모성에 의해 저울질되는 탄생의 실질적인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차나무의 탄생은 그런 것이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물리적인 것에 저항해도 저항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산야에 풀과 나무와, 그것과 조화로운 태동을 느끼면서 자연의 품에 잉태되고, 모성성에 의해 생육하고 발달하니, 그것이 곧 태양이요, 해풍이요, 바람막이 되어줄 둔중한 산야의 벽 안에서 어른다움의 풍모로 이어지는 법이다.


더불어 후(后)가 뜻하는바 중 왕후(王后)라는 뜻을 접목하고 있는 것이기에 토지는 여성성으로 보아야 한다. 황(皇), 천자(天子)를 이르며 하늘에 해당 되는 뜻으로, 후의 뜻과 대비되는 남성성에 해당된다고 보면 족할 것이다. 결국 후황(后皇)의 대비되는 단어는 확연하게 대칭적 구조이다. 세상 단어 중 가장 화려함과 풍요한 단어는 곧 후, 황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세태를 ‘앎음’하고 조종하고 있던 모든 권력 앞에 차나무가 곧 ‘이름’되어짐을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 가운데 모든 화려함의 조건 황후의 상서로운 기운으로 차나무는 태어났다. 하늘과 땅, 여성과 남성, 이런 대칭구조의 초자연적인 것에 신비스러움은 삼라만상의 모든 우주를 아우르는 것이다. 불교적 용어로 해석하자면 자비(慈悲)의 본연일지도 모른다.


樹配橘, 배(配) - 짝을 지어준다, 혹은 아내를 맞이하다, 이런 뜻을 가진 동사 표현이다. 짝을 짓는 것은 타성의 상대방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는 통상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니 만큼 후황(后皇)의 대칭적 개념과 더불어 또 하나의 대칭, 성이 다른 것과 ‘짝이룸’이다.


樹- 橘(귤나무 귤) - 귤나무는 따뜻한 기후에서 자란다. 따뜻함은 역설적으로 찬 기운을 상쇄시키는, 즉 따뜻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역 해석이 가능하다. 나무가 가지고 있는 품성 중 따뜻함을 취하는 것,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온화함을 만들어낼 수 있고, 차가움은 따뜻함의 자양인 것이다. 귤나무나 차나무가 잎이 두껍고 찬 성질의 열매나 잎을 만들어내는 것에 비중을 두어 초의선사는 이 부분을 배(配)로 ‘짝이룸’을 만들어 낸 것이다.(차를 너무 마시면 속을 핥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곧 찬 성질로 대변할 수 있다.) 따뜻함(南國)은 부드러움, 온화함, 이런 성질을 말한다. 귤나무를 ‘귤’이라는 단순한 열매나 귤을 문자 표현한 덕(德)으로 해석한다면 곧 한 문장의 철학의 완성이다. 사려 깊은 초의선사의 깊은 뜻은 아마도 ‘인간에게 주는 자애로움, 혹은 자연이 인간에 주는 온화함’ 등의 속 깊은 배려가 있었을 터이다.






▲ 차나무



受命不遷生南國


遷(옮길 천) - 장소를 옮긴다는 것은 있던 자리를 버린다는 뜻이다. 불천(不遷)이라함은 있던 자리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굳건한 지조를 이른다. 옷을 바꿔 입거나, 타인의 이름으로 나를 갈아입지 않으며 나를 나로써 인정하는, 스스로를 택하는 초지일관의 태도를 말하며, 그러기에 불천(不遷)이라 함은 충성스러움과도 동일한 뜻이다. 단 한 번의 조우로 그는 스승을 알아야 했다. 그것은 다산과의 교류가 그러했고, 제자인 소치와도 그러했다. 한번 맺은 교우의 정을 끝내 저버리지 않았던 완당과의 교류도 그러했다. 완당이 제주 대정에 유배를 갔을 당시, 그는 3년을 그곳에서 외로운 친구와 함께 살다왔다. 아름다운 겨울 노송, 완당 김정희의 문인화 ‘세한도(歲寒圖)’ 같은 굳은 절개 ‘겨울 당한 이후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은 곧 초의선사와 완당의 관계에 가장 원천이 되는 절개요 변치 않는 신의였다.


완당의 외로움 속에는 초의선사의 해학이 있었으니, 초의선사와 완당의 42년 지기의 정은 ‘그저 곁에만 있어도 좋음’을 노래한다.

스님은 멋대로 마냥 웃고 있으소.

마음에 걸림돌 없는 곳(무애:無)이 바로 우리 사는 데라오.

사람 옆에 산새는 부질없이 지저귀다 말다하고 손님 맞는 시내 구름,

스스로 더웠다 시원했다 하네.

차로 맺어진 지기의 가장 결연한 시 구절이다.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靜座處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

고요히 앉아있는 것은 한창 익어 향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오묘하게 운행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과 같네.


초의선사에게 남긴 명선(茗禪)이란 글. 정(情)도 움직이지 않는데, 지조가 결연한데, 차나무는 인간 풍모에 따라서 그래야 했다는 철학의 반증이다. 이 구절은 충성스러움은 차가 주는 모든 혜택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종주(縱走)의 개념이다.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어쩌면 옮긴 자리를 탐하는 탐심일지도 모른다. 즉, 욕심을 부린다는 말이다. 욕심을 경계하는, 깊은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남국(南國), 차나무가 잘 자라는, 혹은 귤나무가 잘 자라는 지방(南國)을 이르는데, 남국은 결국 차나무가 있어야할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차는 추운 지방에 있질 못하니 자리를 옮기면 수명을 다하는 것이며, 옮기지 않고 지조를 지키면 생명을 안위를 지킬 수도 있다는 반증의 뜻으로도 이 남국(南國)이라는 말의 뜻을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위치를 버리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고결한 정신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거도인 홍현주에게 청에 의해 동다송 집필을 마치고 간한 편지 내용은 자못 서두에 말한 바 그 의심의 여지, 스스로 흥에 겨운 작업에 대한 몇 가닥 의혹을 남겨두었으니, 그것 자체가 또 다른 신의, 겸손의 가치였을 터이다.


‘초의산인 아무개는 삼가 재배하고 해거도인(海居道人)께 글을 올립니다. 몸은 두루 편안하신지요. 산 바다의 먼 길이라 뵙기를 고대해도 인연이 없고 문안드리려 해도 통하기 어렵습니다. 옛말에 “정이 어긋나면 한 방에 있어도 서로 거슬리고 도가 합하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더욱 가깝다”고 했습니다. 찾기 어려운 말과 모습에 서글퍼하기보다는 차라리 도리(道理)의 돈독함에 맡겨 두는 것만 하겠습니까. 얼마 전 북산도인(변지화) 편에 다도를 물어 오셨기에 마침내 옛 분들이 전하는 뜻에 따라 삼가 동다행(東茶行) 한편을 서술해 올립니다. 말이 분명하지 못한 곳은 별도로 본문을 뽑아내어 뜻을 밝히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 글재주가 변변치 않아 보시기에 번거로울 것입니다. 혹 잘못된 구절이 있으면 비판해 주시는 수고를 아끼지 말았으면 합니다.’






▲ 초의선사


密葉鬪霰貫冬靑


밀엽(密葉) - 촘촘한 잎, 차나무 잎의 상태를 말하는 촘촘하다는 것은 현상의 표현이며, 잎과 잎의 간격이 좁아 서로 기댈 수 있는 협엽(協葉)의 개념이다. 잎이 서로 기대니 몸서리치는 외부풍파, 눈발(鬪霰)에도 온전한 본연의 상태를 유지한다. 잎의 간격이 좁으니 자연 소란스러움도 없으리라. 소란스럽게 외부의 적과 다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 서로 협력하여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는 뜻이다. 이는 차나무의 성질 가운데 인간에게 주는 교훈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가르침이다. 적이 나를 공격해도 평정심을 잃지 않음으로서 내 위치를 바로 세울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위치 또한 늘 푸르니 이는 처음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 고고함이다.


투산(鬪霰) - 못된 짓, 남을 괴롭히는 짓, 차나무의 잎을 떨어트리기 위해 겨울에 불어대는 바람, 상대방을 희롱하고 상대방을 함정에 빠트리는 일 따위들은 생명이 짧으니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다 없어지는 시간 제한적인 의미이다. 하지만 보다 깊은 뜻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악의 개념보다는 투(鬪)라는 동사가 정지된 상태를 흔들어 변화를 만들어내는 개념으로 정리하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못된 짓(霰)이라기보다는 겨울을 지내는 동안(貫冬)의 인내를 말하는 새로운 해석에 도전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초의의 사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어떤 정지된 개념을 뒤흔들어 새롭게 다른 개념을 주장하는 것, 그것이 겨울 다음의 봄이라는 계절이 ‘희망’으로 역설한다는 추상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문장의 테마를 변혁, 혹은 변화로 보고 싶다. 겨울 다음의 봄이 그러하듯이. 겨울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법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봄의 변화를 갈망하는 변혁은 분명 흥분되는 일임에 틀림없다.






▲ 추사 김정희



素花濯霜發秋榮


소화(素花) - 소화(素花)의 개념은 흰 꽃이, 어떠한 침탈(濯霜)로부터도 변화하지 않는 한 색깔로 유지되는 생명력을 이른다. 소(素)의 다른 뜻 중 생명이라는 뜻도 포함되니 영 그른 해석은 아니리라. 흰 것은 다른 색에 비하여 금세 더러워지나, 이곳에서 ‘희다’의 개념은 백(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명(無明)의 바탕으로 하는 ‘희다’의 뜻이다. 소(素)는 화려한 무늬는 없으나 꽃으로 비견되는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 상태이다. 불변이 아니라 그냥, 그저 자연스럽게 그대로 있는 개념이다.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변화되려 하지만 표면의 평화는 깨어지지 않는다. 내부의 변화는 곧 서리(霜)로 씻어내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세월이 흘러도, 서리(霜)가 내려도 영화로움을 잃지 않는 ‘희다’의 개념이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유지되어, 그 유지됨을 지속적으로 가서 세월이 흐르면 영화를 얻게 된다. 더불어 가을의 서리로 씻어낸다 해도 그 느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서리가 내리는가(霜發) 인가, 가을이 도래하는가(發秋)인가 하는 점을 논하지 않더라도, 서리(霜)와 가을(秋)은 동일개념으로 볼 수 있다. 가을이 되어야 서리가 내리지 않는가. 서리(霜)는 잉태이고 출산은 영(榮)으로 대비되는 잉태와 출산은 동의어이다. 인과(因果)는 버릴 수 없는 동일시한 개념들인 것이다.


영(榮) - 이 문장에서 영(榮)을 ‘꽃이 피다’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미 앞 구절의 소화(素花)로 차 꽃은 상태가 어떠한지를 표현했으므로 어떤 ‘성취를 이루다’의 뜻으로 ‘결과를 맺었다’로 귀결할 수 있다.


인고의 세월(鬪霰)을 보내고 결과를 얻어내니 영화(榮華)로다. 하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결국 영(榮)은 과정을 이끄는 힘, 결과물에 대한 표현이다. 결과물에 대한 표현은 지낸 과정에 대하여 부정이든 긍정이든 간에 표현으로 모두 긍정이다. 결과가 예견되질 않는가. 실패는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고, 더불어 성공 역시 무언가를 해낸 경험에 지나지 않음이다. 이 대목은 분명 초의의 무상(無想)의 개념으로 정리될 수 있다. 무상이라는 것은 상념이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념을 비우고 다른 상념의 진입 전의 상태 아닌가. 특히 차나무의 성징은 지조를 지키고,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여성스럽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것을 담기 위해 영(榮)이란 한마디가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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