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굴곡과 함께한 무성서원(武城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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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굴곡과 함께한 무성서원(武城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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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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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이라 생각하며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처럼 큰 규모의 서원이 먼저 떠오른다. 전북 정읍의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武城書院)은 규모면에서는 작지만 굴곡의 역사를 지켜낸 듬직함이 보이는 서원이다. 전라도의 한적한 풍경 속에 국도를 한참 달려야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의 무성서원에 도착한다.





▲ 무성서원

무성서원은 신라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을 모시는 태산사로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훼손되었다가, 조선에 들어서 성종 14년(1483)에 정극인 사후 그을 흠모하는 유림들의 발의로 월연대(月延臺)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숙종 22년(肅宗 1696)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지금의 무성서원(武城書院)이 되었다.

무성서원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의 현감, 유림 등이 청원하여 화를 모면했다.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은 전국에 47개가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는 필암(筆巖), 포충(褒忠), 무성(武城)서원 세 곳이 철폐령에서 제외되었다.





▲ 무성서원 현가루(絃歌樓)

무성서원의 입구에는 서원의 출입문 겸 누각인, 원주(圓柱)를 세운 2층으로 된 기와집 현가루(絃歌樓)가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 무성서원 명륜당

문루(門樓)인 현가루를 지나면 앞면 5칸, 옆면 2칸 팔작지붕의 명륜당이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인조 28(1828)년에 중건하였으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화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었다.





▲ 무성서원 사우(祠宇)

명륜당 뒤편으로는 위패를 모시는 사우(祠宇)가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의 사우는 성종 15년(1484)에 세워진 것이나 헌종 10년(1844)에 중수되었다. 사우에는 최치원을 비롯하여 신잠(申潛),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林), 정언충(鄭彦忠), 김약묵(金若默), 김관(金灌) 등의 향현(鄕賢)을 배향(配享)되어 있다.





▲ 무성서원 사우(祠宇)의 편액

최치원은 신라말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을 원하여 정강왕 1년에 태산(泰山 : 지금의 태인) 태수로 부임하여 8년 동안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흠모한 나머지 월연대라는 생사당(生祠堂 : 생존하고 있는 사람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불렀다. 이 태산사가 무성서원의 시초이다.





▲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賞春曲)" 앞부분

또한 사우에는 최초의 가사작품 "상춘곡"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정극인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정국인은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유생들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귀향살이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귀향에서 풀려나 뒤 그는 이곳 태인으로 내려와 초사(草舍)를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하고, 안빈낙도과 후학양성으로 일생 보냈다.





▲ 무성서원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신라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굴곡과 함께한 무성서원. 상춘곡의 풍류와 안빈낙도가 흐르는 무성서원. 대원군의 서원철폐에서도 의연히 자리는 지킨 무성서원. 무성서원을 나서며 화려한 꽃이 아닌,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들꽃의 의연함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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